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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당신의 선택은?

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by 이윤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화장실 괴담





어릴 때, 특히 밤이 깊어지면
혼자 화장실을 가는 일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나 어른들이 장난처럼 말하곤 했죠.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이 말이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가거나, 부모님의 손을 꼭 붙잡고 화장실로 가곤 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그냥 무섭다'라고만 느꼈지만, 지금 돌아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하필 빨강과 파랑이었을까?
왜 꼭 두 가지 색으로 나뉘어 있었을까?


어쩌면 이 괴담 속에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삶의 선택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작은 기로에 서 있습니다.


조금 더 쉬어갈까, 아니면 일어나서 움직여볼까?
나가서 사 먹을까, 집에서 간단히 해 먹을까?


크고 작은 선택들 속에

우리는 날마다 빨강과 파랑 사이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pubs-on-the-spiritual-inn-art-kandinsky-A2002.84-resized-e1463505077847.jpg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_칸딘스키




현대 추상화의 아버지 칸딘스키는 색을 단순한 시각 요소가 아니라 마음에 울림을 주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각 색이 고유한 정서·진동·내적 울림을 가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붉은색은 트럼펫처럼 직접적이고 강렬하며, 즉각적으로 마음을 끌어올리는 소리입니다.
파랑은 오르간처럼 깊고 고요한 소리이며, 영혼을 천천히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칸딘스키에게 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소리는 마치 서로 다른 성향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서 늘 함께 존재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트럼펫 같은 빨강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다른 순간에는 오르간 같은 파랑의 평온함이 필요하듯, 우리는 그 사이에서 감정의 자리를 선택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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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앙리 마티스_붉은 방, 1909 (우) 파블로 피카소_비극, 1903




이 ‘뜨거운 빨강’의 성질을 누구보다 대담하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앙리 마티스입니다.

앙리 마티스의 대표작 〈The Red Room〉은 방 전체가 강렬한 붉은색으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그는 빨강을 통해 감정의 충만함, 자유, 살아 있는 에너지를 표현했습니다.

빨강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색입니다. 충동, 열정, 즉흥적인 도전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죠.
무언가를 ‘해볼까?’ 추진하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빨강에 끌립니다.


반대로 파랑은 훨씬 고요하고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청색 시대(1901~1904)의 작품들은 슬픔, 고독, 사유를 온전히 파란색으로 표현한 시기였습니다. 파랑은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가라앉히고,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하는 색입니다.

마음을 정리하고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파란색이 좋아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빨강과 파랑의 성향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고대 철학에서도 다루어진 인간 내면의 구조와 닮아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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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플라톤 (우) 파이드로스_마차의 비유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크게

이성(Logos), 기개(Thymos), 욕망(Epithymia) 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 『파이드로스』에서는 영혼을 두 마리의 말(기개와 욕망)이 끄는 마차, 그리고 그 마차를 다스리는 마부(이성)에 비유했습니다.


이 비유를 색으로 다시 읽어보면 한 가지가 선명해집니다.

마부는 파랑과 닮아 있습니다. 파랑처럼 고요하고 차분하며, 방향을 잡고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려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 마리의 말은 빨강과 닮아 있습니다. 빨강처럼 뜨겁고 즉각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으며,
때로는 통제가 어렵고, 때로는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플라톤이 말한 ‘좋은 삶’은 마부(파랑)와 말들(빨강)이 서로 억누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였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이성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두 힘이 서로의 속도를 맞추며 균형 있게 걸어가는 삶.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뜨겁게 달리고 싶은 마음(빨강)과 차분히 방향을 잡고 싶은 마음(파랑)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이 두 색은 결국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부딪히고 화해하는 두 가지 마음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말했습니다.

선택은 그 사람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하루 동안 마주하는 크고 작은 선택들은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결과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새로 열리는 문이니까요.


어떤 날은 빨강처럼 뜨겁고 대담한 마음이 필요하고,
어떤 날은 파랑처럼 조용히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선택의 색’들이 존재합니다.


결국 우리는 빨강과 파랑 사이의 무수한 색 중 하나를 고르며,
오늘의 나를 만들어갑니다.


오늘 당신이 고른 그 작은 선택의 색이
내일의 당신을 조금 더 단단하게,
그리고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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