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병진 Aug 17. 2018

아버지의 생애최초 주택구입 표류기

나의 선택과 아버지의 선택 

7. 

우리 가족이 처음 우리 집을 가졌던 건, 1995년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내 기억으로 볼 때, 우리 가족의 출발점은 신당동의 단칸방이었다. 아주 작은 마당이 있 었고, 주인집이 있었다. 대문에는 셰퍼드 한 마리가 개집에 묶여있었다. 주인집 옆에 있는 작은 단칸방이 우리 네가족의 보금자리였다. 그곳에서 자라 네 살이 될 때쯤 신당동 단칸방 에서 불광동 단칸방으로 옮겨왔다. 그리고는 다른 단칸방으로 옮겨갔다. 우리 가족은 불광 동에서만 4곳의 단칸방을 전전했다. 처음으로 내 방을 가진 건, 중학교 1학년때였다. 외삼 촌에게 돈을 빌려서 얻은 방3개짜리 반지하 빌라였다. 거기서 다시 다른 반지하 빌라로 옮 겨갔을때, 아버지의 회사에서는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았다. 그때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가 족회의를 소집해서 퇴직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아버지의 은퇴는 매우 적 절했다. 그로부터 2년 뒤, IMF사태가 터졌다. 아버지가 시간을 더 끌었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은퇴였다. 시간을 더 끌었다면, 퇴직금도 줄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감당할 능력도 안되면서 왜 빚보증을 섰는지. 빚보증 사고가 터지면서 빚이 늘어났고, 그래서 아버지는 1억 가까운 퇴직금의 절반을 빚을 갚는데 써야했 다. 결국 우리 가족에게는 집을 살 수 있는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이제 집 에 빚이 없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사실 그때도 처음부터 집을 사려 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일산 에 새로 지은 빌라단지를 보러다녔다. 어머니는 전세 4천만원에 방 4개에 거실도 넓은 집을 보고 반해버렸다. 오랜 단칸방 생활과 반지하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빛도 들어오는 넓은 집 에 살아볼 수 있겠구나 싶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여러 집에 살았지만, 어머니는 항상 비를 걱정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혹시라도 집에 물이 차지 않을까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어 머니는 새로운 집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선택은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의지로 꺾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일산의 집들을 돌아보며 “여기는 도둑놈들만 사는 동네”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 이 나름 합리적이라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놓고는 나와 둘이 있을때, “일산에 살 면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들지 않겠냐”고 했었다. 아버지의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 서 결국 산 집이 지하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을 달려, 다시 10여분을 기어올라가야 하 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빌라였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기이하다. 그래도 너무 놓은 곳에 있어 서 폭우에 집에 물이 찰 걱정은 없었다. 아버지가 받은 퇴직금에서 빚을 갚고 남은 돈에서 다시 대출을 받아 산 집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약 7년을 살았다. 그 사이에 나는 군대를 다녀왔다. 그런데 그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빚이 또 늘었다. 은퇴한 아버지는 뭔가 다른 돈벌이를 하려 했 다.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일을 했고, 누나도 누나대로 일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쉽지 않았다. 카드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고, 그런 상황이 이어졌다. 7년 후, 우리 가족에게는 약 1억이 넘는 빚이 쌓였다. 우리 가족은 7년 만에 다시 가족회의를 했다. 지금 당장 갚아야 하는 빚이 얼마나 되는가를 따져 물어서 계산했다. 부모에게나 자 식에게나 참 많이 아픈 가족회의였다. 부모님은 그 와중에도 우리가 상처받을 걸 걱정해 빚 진내역을조금씩감추려했다.하지만누나와나는 모든빚의내역을파악하기위해아버 지와 어머니에게 뼈를 때리듯 아프게 물어야 했다. 결과를 놓고 보니 결론적으로 집을 팔아 야 했다. 집을 팔아서 집을 살 때 대출받았던 돈을 먼저 갚아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개인파산신청을 해서 청산하기로 했다. 집을 판다는 건 곧 우리 가족의 분리를 뜻했다. 누나와 내가 한 팀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팀으로 각각 다른 월세집을 찾아야 했다.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누나와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서 살 수 있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누나와 나는 그리 많은 집을 보 러다니지 않았다. 우리는 비싸더라도 우리가 살고 싶은 집을 찾으려 했다. 일산 장항동의 어느 복층 오피스텔을 봤을때 마음을 뺏겨버렸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가 45만원인데, 우리는 이곳을 선택했다. 그때도 나름 많은 계산을 했다. 그때 나는 압구정에서 아르바이트 를 하고 있었다. 집과 직장의 거리가 매우 멀지만, 나는 퇴근 후 이곳에 들어오면 밖에 나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평소에 친구만나는 일도 줄어들고, 그만큼 쓰는 돈도 줄어들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먼저 이사를 한 후에 누나와 내가 이사를 했다. 이사는 힘들고 어려 운 일이지만, 더 넓고 더 좋은 집으로 가는 이사는 그리 힘들지 않다. 그날의 이사는 더 좁 고, 더 낡은 집으로 향하는 이사였다.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30만원. 방 2개와 화장실 하 나. 그리고 전보다 너 높은 언덕에 위치한 집. 이사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표정에서는 희망이 없었다.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은 좁은 집에 짐을 넣은 후 “사장님, 부자되세요”란 말과 함께 떠났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그날은 정말 의례적으로 들렸다. 그날 저 녁 어머니는 아직 누나와 내가 있는 그 집으로 왔다. 내가 치킨을 사왔던 걸로 기억한다. 치 킨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가 울었다. 누나도 울었다.


나는 누나와 일산에서 약 1년을 살았다. 1년 후, 나는 학교로 복학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누나는 14년에 걸쳐 사랑해 온 매형과 결혼했다. 졸업 후 취업준비를 할때는 어머니, 아 버지와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집에서 나온 건, 내가 취업을 한 이후였다. 3천 5백만원을 대 출받아서 전세 5000만원의 다세대 주택 반지하로 들어갔다. 방은 3개였고, 위치는 언덕 아 래였다. 이사를 하던 날,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에는 희망이 보였다. 우리는 그 집에서 약 5년을 살았다. 그 사이 아버지는 위암말기판정을 받았다. 어머니의 간병 덕분에 한때 매우 건강이 좋아진 적도 있었고, 그때 아버지는 매형이 사준 차에 엄마를 태우고 여행을 다녔 다. 우리가 다시 그 집에서 나온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였다. 방3개에 넓은 거실이 있 는 나홀로 아파트의 꼭대기층이었다. 반전세 집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때 처음으로 거실 다운 거실을 가져봤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거실에 앉아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내 집을 사면서 미래를 불안해 했던 건, 아버지의 사례 때문이었다. 아버 지처럼 은퇴 후에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나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아 파트를 계약해서 대출을 많이 받는 것, 역세권에 위치한 신축빌라인 동시에 넓은 집을 계약 해서 대출을 많이 받는 것. 하지만 나는 대출이 두려웠다. 어느 덧 마흔이 됐고, 내가 직장 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날은 길어야 10년에서 15년 정도 남았을 것이다. 대출을 많이 받았다 가, 그걸 다 갚지 못한 상황에서 직장생활을 그만두게 되면 나는 아버지의 사례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지가 첫 집을 산 건 54세였지만, 나는 40세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은퇴 후에 집을 샀지만,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 집을 샀다. 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전 07화 내 집이 아니라 가족의 집을 살 때 생겨나는 일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