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1. 한민석 가족

시끄러운 가족

by 마봉

한민석(47, 옥수수 농장 주인)은 콘리지 마을 술집 ‘미친 옥수수’에서 ‘블랙루트 스피릿’을 조금 과하게 마시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발목을 접질린 그는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기 집 안드로이드 ‘엘레나’의 등에 업혀 집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엘레나’는 한민석네 집의 안드로이드였다. 보통 식민 행성 가정집이라면 한두 대 갖고 있는 인간형 안드로이드인 엘레나는 원래 기종번호가 LN-A1인 것을 민석의 아들인 한도윤이 엘레나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름이 엘레나로 굳어져 버렸다. 물론 성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드로이드는 주인의 성향을 따라 목소리나 말투를 남성, 여성, 혹은 완전 중성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민석네 집의 LN-A1은 엘레나로 불리게 되고 나서부터 여성형으로 조정되었다.


한민석의 아내 서지연(45, 주부)은 엘레나의 등에 업혀 돌아온 민석을 보고 걱정하거나 안타까워하기는커녕 혀를 끌끌 찼다.


“이 양반아! 이 동네 술은 독하니까 노바리아에서처럼 마시면 금방 꽐라 된다고 몇 번을 말해! 발목도 다쳤으니 이제 농사일 어쩔 거야? 엘레나 보고 농사지으라고 할 거야?”


“엘레나는 농사짓는 로봇이 아니에요!” 아들인 한도윤(15, 학생)이 황급히 뛰어나오며 외쳤다. “여기 습기가 엘레나 같은 민감한 기계한테 얼마나 안 좋은지 아시잖아요!”


“폭우 속에 내놓지만 않으면 걱정 없다. 너는 그놈의 엘레나 걱정할 시간 있으면 애비 걱정 좀 해라!”


“여기는 노바리아보다 중력이 더 높으니까 술 마시면 평소보다 더 조심했어야지!” 서지연이 말했다. “노바리아는 0.8인데 여기는 1.1이잖아. 노바리아 생각하고 뽈뽈뽈 돌아다니면 크게 다친다고! 술 마시면 차라리 술집에서 자고 와!”


“술집에 자꾸 날벌레가 들어와서 잘 수가 있냐고! 여긴 대체 왜 이렇게 벌레가 많은 거야! 크기는 참새만큼 크고!”


“지구 모기처럼 물지도 않는데 좀 들어오면 어때서? 여기 벌레들은 멍청해서 물지도 않고 그냥 흐느적거리면서 날아다니기만 하는데 뭘.”


“당신이 춥다고 못살겠다고 하는 바람에 노바리아 버리고 여기 온 거잖아!”


“내가 아벨론 가자고 했지 여기 오자고 했어? 여기는 덥고 습하니까 아벨론 가고 싶다고 했는데 당신이 농사지으려면 여기가 낫다고 여기 골랐잖아!”


“거기는 신생지역이라 아직 뭐가 나올지 모른다고! 안정된 식민지는 여기 아니면 엘리시움인데 엘리시움은 농사짓기 힘드니까 여기가 낫지! 젠장, 중력이 이렇게 높을 줄 내가 알았냐고! 습기도!”


한도윤은 귀를 막으며 엘레나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 닫았다. 방 안에는 청소년을 위한 로봇공학 입문서와 각종 공학 관련 서적과 포스터로 가득했다.


“엘레나,” 도윤이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너무 시끄러워. 나는 이런 집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엘레나가 대답했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성인 평균 목소리 데시벨 기준 상위 10% 안에 들어가십니다.”


“다른 걸로 좀 상위권에 들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나도 농사일이나 돕는 게 아니라…” 도윤은 엘레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로봇공학을 공부해서 너에게 고성능 양자 두뇌와 고급 티타늄 관절을 달아줄 수 있을 텐데…”


“저는 지금도 충분히 정상적으로 기능합니다.” 엘레나가 말했다. “저의 다음번 부품 점검 시기까지는 335일 남았습니다.”


“너의 겸손함이 놀라울 뿐이야, 엘레나.” 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인간이 너처럼 품위 있는 인성을 가졌다면 세상이 좀 더 평화로울 텐데…”


거실에서는 여전히 도윤의 부모님이 옥신각신 시끌벅적하게 다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도윤은 다시 한숨을 쉬고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접이식 학습 패널을 펼쳤다.

ChatGPT Image 2026년 1월 25일 오후 04_20_50.png 한민석이 '미친 옥수수' 술집에서 쿠당탕하는 모습(주위 사람들 왜 다 웃고있지)

주치의가 도착했다. 현관문 바로 앞까지 방수막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옆으로 들이치는 비 때문에 그의 양팔은 젖어 있었다.


데메트리아 중위도 지역은 비가 워낙 많이 와서 어지간한 비는 사람들이 다 맞고 다니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냥 맞으면 뼛속까지 다 젖을 정도의 폭우가 하루에 2차례가량 내렸다. 주치의는 하필 그 시간에 도착했다.


그의 뒤에는 은회색 의료 보조 안드로이드가 조용히 따라 들어왔다. 관절이 움직일 때마다 거의 들리지 않는 기계음이 났다.


“저것 좀 봐 엘레나, 방습 특수합금으로 만든 관절이야. 너에게도 저걸 달아준다면 이곳의 습기에도 걱정 없을 텐데.”


“제 관절은 폭우 속에서도 3시간은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그 이후에는 방수 차폐막을 두르고 추가로 3시간 더 기능할 수 있습니다.”


“너는 욕심이 없고 겸손하구나, 엘레나.” 도윤이 말했다. “인간보다 네가 훨씬 나은 것 같아.”


“저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엘레나가 말했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욕심’이나 ‘겸손’ 같은 성질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휴, 술 냄새가 아직도 나네.” 의사가 한민석의 발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뭐, 발목으로 술을 마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민석이 투덜거렸다.


“발목으로 술을 마셨으면 지금쯤 다리는 하늘로, 머리는 땅으로 향하고 있겠죠!” 주치의가 말했다. “노바리아에서 오셨댔죠? 거기 술이랑 여기 술은 달라요. 노바리아 화이트 드리프트처럼 마셔댔다가는 그냥 한방에 골로 갈 수 있슴다!”


“거 참 의사 양반 말 무섭게 하네. 빨리 발목이나 고쳐 주쇼. 내 주량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의료 보조 안드로이드는 대답 대신 민석의 발목 위로 스캔 광선을 비췄다. 짧은 진동과 함께 상태 표시가 공중에 떠올랐다.


“미세 인대 손상. 골절은 없고요.” 주치의가 화면을 확인한 뒤, 민석의 발목을 직접 눌러보았다. 민석이 이를 악물었다.


“기계가 다 봤잖아요.” 민석이 말했다.


“그래도 만져 봐야 알죠.” 의사는 태연했다. “아픈 건 수치로만 안 나와요.”


그는 반투명한 치료 패치를 발목에 붙였다. 패치는 붙자마자 서서히 따뜻해졌고, 표면이 미세하게 파동을 일으켰다. 이어서 압력 고정 밴드를 감았다.


“많이 걷지 말고 쉬세요. 한 일주일이면 낫습니다.”


“농사는요?” 서지연이 물었다.


“하루에 하우스 하나만.” 주치의가 말했다. “뛰는 건 금지. 술도 금지. 벌레 보고 놀라서 피하는 것도 금지.”


“그게 제일 어렵겠네.” 민석이 중얼거렸다.


의사와 안드로이드는 곧 떠났다. 문이 닫히자마자 집안은 조용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싸움이 잠시 멈춘 정도였다.


“오늘 하우스 3개는 둘러봐야 하는데.” 민석이 말했다.


“하루이틀 정도는 모니터링 패널로만 보고, 마른 잎 따 주는 것만 나랑 도윤이가 할게.” 지연이 말했다.


“저도요?” 도윤이 물었다.


“아빠가 아프시니까, 너도 도와야지. 숙제 빨리 하고 내려와라. 아침 먹고 같이 나가보자.”


“나는 괜찮아.” 민석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연이 그를 바로 눌러 앉히며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


“으윽!”


민석은 아까 의사가 발목을 눌렀을 때보다 더 이를 악물었다.

ChatGPT Image 2026년 1월 27일 오후 02_45_10.png 주치의가 민석의 발목을 진단하는 모습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