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판 가야(아가) 하카타점
한국인들에게 알고 있는 일본 음식의 이름을 대보라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라멘, 우동, 돈까스의 세 가지이다. 그 후로는 초밥이나 소바, 조금 더 나아가선 돈부리 정도. 물론 뭘 좀 먹어본 사람들은 나베류부터 디저트까지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7~8개 선에서 대화가 종료된다. 그러나 점점 소재가 떨어져 갈 때쯤이면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이 불쑥 튀어나온다. 라멘이나 우동보다 긴데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입에 착착 붙는 그 이름, 오꼬노미야끼.
지인들로부터 오꼬노미야끼라는 말이 나올 때면 문득 속으로 궁금해진다. 오꼬노미야끼를 먹어본 적이 있을까? 먹어봤기에 이름을 댈 수 있는 건가?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나부터가 오꼬노미야끼를 먹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17년 인생 중 단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후쿠오카 여행을 다니며 몇 번 맛을 봐보긴 했으나, 꽤 오래 전의 일이기에 기억도 나지 않을뿐더러, 설령 그 맛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들 심하게 왜곡되어 있거나 추억보정(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해 추억에서 오는 감성을 더하여, 보다 좋게 평가하는 것)이 들어갔을 확률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이전까지의 오꼬노미야끼는 미련 없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나는 오늘 밤, 내 안의 오꼬노미야끼의 역사를 다시 써 내린다.
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자취방을 나선 순간, 하늘이 내 굳건한 의지를 시험하려는 것인지 연한 빗방울을 하나 둘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국엔 '비 오는 날은 파전'이라는 풍습 아닌 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가엽지만 한국인인 내겐 통하지 않는다. 마치 하늘에게 반발이라도 하는 듯이 산뜻한 발걸음으로 거리로 나갔다.
라곤 해도, 딱히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감도 안 왔다. 애초에 일절의 사전 조사 없이 집을 나왔으며, 계획이라 해도 길을 걷다가 느낌이 오는 집에 들어가자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느낌이 머리에 꽂힐 때가 있는데, 발현되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가, 기분 좋은 식사를 마쳤다면 이 집이 정말 맛있게 한 건지 아니면 새 식당을 뚫었다는 나의 단순한 만족감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서 자주 써먹진 않는다. 룸메는 이것을 '촉'이라 부른다.) 사실 하카타역 인근 건물의 상층부에 후끼야라고 유명한 국민 야끼소바집이 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면의 길이도 그렇고 여러모로 취향이 아니어서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새로운 곳을 뚫자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저번 편인 오므라이스와 비슷한 전개가 되어버렸지만, 약간 결이 다르니 주의.
희미하게 보이는 가로등 불빛을 내비 삼아 큰길로 향했다. 좌우 시야를 막던 건물들을 뒤로하자 빗물을 뚫고 달리는 자동차들이 앞을 지나갔다. (비록 귀가 후 몇 시간 동안이지만) 차도와 떨어진 조용한 거리에 있다 보면 가끔 이런 물체의 이동 소리가 그리워진다. 파란 불에 신호등을 건너자 보인 건 목재 간판에 시원하게 쓰인 한자, 그리고 글자로 뺴곡하게 채워진 메뉴판. 뚫게 된다면 정말 뿌듯할 외관이었다. 쌀쌀하고 눅눅한 바깥에서 본 식당 내부의 온도는 조명 때문인지 유러피안 대저택의 벽난로보다도 따듯해 보였다. 춥고 배고픈 성냥팔이 소녀가 된 나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철판이 설치된 테이블에 앉았다. 다행히도 손님이 얼마 없었던 덕에 4인석에 앉을 수 있었다. 퇴근 후 담배와 함께 식사를 즐기는 회사원 두 명을 흘긋 쳐다보며 새삼 일본의 식당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일본 식당은 식사 중 흡연이 허용되어있다. 이는 카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프랜차이즈 카페에선 재떨이를 보유하고 있는 곳도 많다. 듣자 하니 최근 몇몇 식당에선 금연화에 힘쓰고 있다는 소식이 있는데, 아직까진 흡연이 가능한 쪽이 우세한 듯하다.
메뉴를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점원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기왕이면 해산물이 들어간 게 좋다는 내 요청에 MIX 오꼬노미야끼를 추천해준 친절한 점원씨. 돼지고기와 오징어 다리, 새우가 섞여 들어간 오꼬노미야끼로 가게를 처음 찾은 손님들이 많이 주문하는 메뉴라고 한다. 마음에는 들었지만 만에 하나 입맛에 맞지 않을 경우 나를 구제해 줄 구명조끼가 필요했기 때문에 계란 후라이를 올린 야끼소바도 함께 주문했다(대식가인 데다 평소 공복 상태보다도 더 배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니 따라하지 마세요). 아직 음주가 허용되지 않는 나이이기 때문에 음료는 우롱차로. 주문이 들어감과 동시에 주방 아저씨가 굵은 팔뚝으로 기세 좋게 돼지고기를 철판에 올렸다.
주방 아저씨의 불쇼에 감탄하며 흘린 침이 테이블에 닿을 때쯤 주문했던 야끼소바가 나왔다. 그릇에 담겨 나오는 줄 알았는데, 테이블 철판의 불을 켜더니 호일을 한 장 깔고 그 위에 야끼소바를 얹어주었다. 원래 이곳에서 놀던 놈이 아닌데, 환경이 바뀌어도 금세 적응하여 보기 좋게 구워지는 그가 기특했다. 큼직한 얼음이 동동 띄워진 우롱차부터 쭈욱 들이킨 후, 애피타이저 겸 야끼소바부터 천천히 공략해보기로 했다.
노란 조명 빛을 반사하는 야끼소바 면은 노을 진 바다의 윤슬과도 같았다. 달콤 짭짤한 야끼소바 냄새가 그 위의 담백한 노른자를 뚫은 후 철판의 열기를 타고 올라온다. 계란 후라이 옆으로 보이는 갖가지 재료들은 야끼소바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양배추에 숙주, 돼지고기까지... 평소에 달랑 숙주와 면뿐인 야끼소바만 먹던 나에게 이런 성대한 재료의 야끼소바는 거의 혁명이었다. 부디 계란 후라이의 탱글탱글한 노른자가 터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철판 스파츌라로 조심히 들어 올려 옆으로 옮겨놓았다. 후라이 아래에 감춰져 있던 면을 들어 올리자 열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입 안이 데이지 않을 정도만 식힌 후 입에 넣자 진한 야끼소바 소스의 풍미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쫄깃한 면발에 감동한 후, 노른자에 터트려서 찍어 먹어보기도 했다. 야끼소바의 짠맛을 담백한 노른자가 잡아준다. 혼자 앞서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는 노른자이지만, 감출 수 없는 그의 상냥함은 서투른 야끼소바의 짠맛을 약간은 용서해준다. 부드러운 면과는 또 다른 매력을 자랑하는 아삭한 숙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브레이크가 되어주는, 거대한 시계태엽 장치와도 같은 야끼소바의 구조는 현대 요식 학계의 논문감이다.
혼자 속으로 북 치고 장구치고 감동의 도가니를 가마솥에 펄펄 끓이고 있을 무렵, 이 식당의 진짜 방문 이유인 오꼬노미야끼가 등장했다. 이미 반절 먹은 야끼소바야 내가 원래 좋아하던 음식이니 맛있게 먹었지만, 오늘 처음 먹(는다고 해도 무관할 정도로 오래전에 먹어서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오꼬노미야끼는 과연 어떠할지. 뜨거운 철판 위에서 춤을 추는 가쓰오부시는 너무 궁금한 나머지 선뜻 젓가락을 갖다 대지 못하는 나에게 마치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타는 무대 위에 서서 오로지 나만을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춤을 추는 그들은 단언컨대 내가 여태껏 봐온 수많은 무용수 중 가장 아름다웠다. 가쓰오부시의 초대를 승낙하며, 철판 스파츌라로 작게 사각 모양으로 잘라낸 오꼬노미야끼 조각을 조심스레 앞접시로 가져왔다. 썰린 단면에는 돼지고기와 양배추가 보였다. 그렇다면 내 조각에는 오징어나 새우가 들어있겠지, 하며 조각을 입에 넣었다. 역시, 탱글한 새우와 부드럽게 씹히는 밀가루 반죽에 마요네즈의 맛이 더해져 간다. 세 가지 종류의 토핑과 단면의 높이 때문에 언뜻 보기엔 속재료로 뭐가 많이 들어간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다. 그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가 정답이려나. 고소한 돼지고기와 쫄깃한 오징어 다리, 사각한 양배추가 모두 어우러져 이 모든 게 마치 하나의 음식이 되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이 강한 마요네즈를 파슬리가 상냥하게 제재해준다. 비록 춤추는 가쓰오부시의 후광에 가려졌을진 몰라도, 그의 역할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하다.
촉촉하면서도 푸근한 오꼬노미야끼를 입에 넣고 또 넣자, 역시 간장 베이스 요리의 불가피한 교집합이자 단점인지, 슬슬 짠맛이 입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럴 땐 능숙하게 우롱차를 크게 한 모금 들이킨다. 시원하고도 약간 씁쓸한 우롱차가 입 안의 기름기를 품고 사라진다. 걸림돌이 없어진 듯한 쾌감으로 다시 한번 철판에 스패츌라를 갖다 댄다.
열심히 음미한 후 시계를 봤을 땐 이미 9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보통은 7시 이전에 저녁을 해결하는 편인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철판 요리를 먹다니 왠지 고된 하루를 마치고 찰나의 휴식을 취하는 회사원이 된 기분이었다. 방금의 식사가 오늘 하루의 마무리가 될지 내일을 위한 준비가 될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오늘 훌륭한 식사를 즐겼다.
가끔 가다 머리에 꽂히는 '촉'이라는 느낌에 맡긴 저녁 식사는 성공적이었다. 처음(이라 해도 될 정도로 오랜만에) 먹어본 오꼬노미야끼는 뇌리에 천상의 맛으로 각인되었으며, 야끼소바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기분 좋은 식사를 마쳤지만 역시나 그것이 정말 맛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처음 보는 식당에 발을 들였다는 점에서 온 만족감인지 아직 어린 나로선 여전히 알 방도가 없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P.S. 사업 번창을 바람과 동시에 나만 알고 싶은 그런 식당...
주소 : 3 Chome-14-10 Hakata Ekimae, Hakata Ward, Fukuoka, 812-0011 (〒812-0011 福岡県福岡市博多区博多駅前3丁目14−10)
전화 : +81 92-481-0368
Facebook : https://www.facebook.com/teppangaya?ref=stream&viewer_id=0
영업시간 : 오전 11:30~오후 2:00, 오후 6:00~10:30 (일요일 휴무)
* 저는 음식, 맛집 블로거가 아니며 매장 혹은 점주로부터 어떠한 대가를 받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일본에 단기 어학연수차 2달간 후쿠오카에 체류하면서 나름 최고의 식당을 찾아 떠난 극히 개인적인 체험담을 일기 삼아 브런치에 차곡차곡 담아보려 합니다. 이 곳에 올려진 그림은 제가 직접 그리거나 촬영하여 편집한 사진으로써 저의 사전 동의 없이 무단으로 도용하거나 퍼가시면 안 됩니다.
이때로부터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2022년 10월, 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사장님은 그대로 계실까? 아니 그 이전에 영업은 하고 있을까? 하는 온갖 물음표를 머릿속에 끌어안은 채 식당을 찾았고, 싸늘한 가을 밤 공기와는 대조되는 가게 안의 열기가 나를 스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어째선지 고향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을 그리워했던 탓인지 여태껏 먹었던 철판 요리 중에서 최고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음미하며 눈 앞의 작은 천국을 즐기던 중, 사장님이 다가와서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셨다.
"2년 반 만에 오셨네요."
터질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식당을 나왔다. 코로나 시대, 우리 일상의 많은 것들이 변하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놓쳤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늘 그대로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 이 집도, 언제나 이곳 이 자리에 있었듯이. 그리고 그런 영구한 가치들은,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