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야 하루요시점
눈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추운 1월의 겨울날, 텐진에서 잠깐 볼일을 보고 걸어서 하카타로 돌아가는 길에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달리는 차량 사이사이로 유심히 쳐다보자 역시,「요시노야」 라는 이름이었다. 날씨도 추운데 규동 한 그릇 먹고 가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인파 속에서 횡단보도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여기서 잠깐, 요시노야란 식당은 이른바 규동계의 교과서와도 같은 곳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우리나라 김X천국과 유사한데 사실 그것보다도 더 국민 식당이다. 김밥X국은 식당 자체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요시노야는 일본 내에서 정석이란 느낌이라 연령대도 다양하고 회사원들 출퇴근 메뉴 선정 시 항상 후보로 들어가 있는 프랜차이즈라 스케일의 차이가 좀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미닫이 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가자 내부의 뜨거운 공기가 안경에 구름을 찍어냈다. 1인용 테이블에 앉아 손을 닦으며 평소대로 규동에 된장국 세트나 먹을까... 하며 둘러보던 중, 가게 벽면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큼지막한 소고기 전골 사진과 함께 「스키야끼」 라고 적힌 포스터였다. 스키야끼를 먹어본 적은커녕 그게 뭔지도 모르는 나였지만 사진 속의 전골이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웠던 나머지, 들어오기 전부터 생각했던 규동은커녕 스키야끼 정식을 주문해버렸다. 역시 춥고 눈 오는 날엔 전골이지. 니꾸나베 비슷한 맛이려나...
한 5분 정도 기다리니 미니 버너 위에 냄비 전골과 쌀밥이 나왔다. 역시 빠르다, 하고 감탄하자 버너의 열기에 달궈진 전골이 공기방울을 하나, 둘 떠올리며 우습게도 도발을 시전 했다. '감히 날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건가?' 같은 느낌. 어디 한번 맛을 좀 볼까, 하고 젓가락을 들어 올리는데 뭔가 걸려서 봤더니 밥그릇 뒤에 그릇이 하나 더 있었다. 뭘 또 시켰었나..? 하며 밥그릇을 들춰보자 웬 날계란 하나가 생뚱맞게 담겨 나온 것이다. 이건 또 어떻게 먹는 걸까. 갑자기 한국의 콩나물 국밥이 생각나서 스키야끼 국물에 넣어 먹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일본인들의 정서를 생각하면 그렇게 먹는 음식은 아닌 것 같았고, 밥에 비벼 먹자니 전골과 게란 밥은 정말 어울릴 것 같지도 않았다. 스키야끼를 앞에 두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참, 건너편 테이블에서 홀로 유유히 스키야끼를 드시는 회사원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왼손엔 그릇, 오른손엔 젓가락이란 정석의 자세로 소소하지만 훌륭한 저녁을 즐기고 계셔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왼손에 들린 건 밥이 아닌 바로 날계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른자를 콕 찍어서 흰자와 섞은 후 소스 삼아 거기에 고기를 찍어 드시고 계셨다. 결코 날계란이란 대목에서 놀란 건 아니다. 익히지 않은 노른자를 이용한 요리는 많이 접해봤으니까. 내게 충격이었던 건 흰자까지 생으로 먹는다는 점이었다. 계란 간장밥도 노른자만 떠서 밥 위에 올리는 방식이었고, 써니사이드업이라 해도 흰자까지는 익혔다. 흰자는 익혀서밖에 먹어보지 않은 입장으로서 상당한 컬처쇼크이긴 했으나 분명 일본에서 그렇게 먹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먹어서 손해 볼 건 없으니 정석대로 가기로 했다.
스키야끼가 때마침 먹기 좋게 보글보글 끓자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한 움큼의 고기와 여러 가지 야채들이 질서 정연하게 쌓인 채 쉴 새 없이 끓어오르는 모습은 흡사 눈 오는 시골의 노천온천과도 같아 보였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쪽은 도심 속의 노천온천이다. 국물부터 한 숟갈 떠먹어봤는데, 오늘 처음 먹어보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좋은 뜻으로)익숙한 맛이었다. 국물 자체는 무 조림? 안동찜닭? 혹은 굉장히 진한 샤브샤브 육수 맛. 추운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뜨거운 국물을 마시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궁금했던 노른자도 터트려서 고기를 찍어 먹어봤는데 세상에... 이런 좋은 걸 여기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간장에 절여진 소고기의 짠맛을 노른자의 담백함이 잡아주는 느낌.
먹다 보면 역시 국물이 섞여 들어가니 어쩔 수 없이 계란이 묽어질 때가 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먹다 보면 느끼게 되는데, 그때쯤이면 고기에서 빠져나온 짠맛 덕에 국물이 진해짐과 동시에 고기에 국물이 충분히 스며들었을 때라 더 이상 계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계란이 리필되는진 모르겠다. 일본 식당에선 반찬 리필이란 개념이 없어서 아마 80엔 정도 받지 않을까 싶지만 일단 나는 하나로도 충분했다.
양배추도 정말 노곤 노곤하니 부드러웠다. 내가 양배추를 좋아해서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위와 비슷한 타이밍(계란이 묽어질 때쯤)에 양배추를 먹으면 최고의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야채 속에 있던 물기는 다 빠지고 국물이 스며든 상태라 촉촉하고 맛있다. 큼직하게 들어간 두부도 입 안이 짤 때 먹으면 담백하니 좋다. 야채를 들춰보면 바닥에 우동 면사리가 깔려있는데, 일반 우동집에서 먹는 면이 아닌 중국 당면처럼 납작한 면이라 식감도 특이하고 재미있다.
그 어떤 음식을 먹든 처음 먹는 한입이 가장 맛있긴 하겠지만, 갈수록 고기에서 나온 간장 맛이 국물에 배어서인지 먹을수록 점점 진해진 덕에 끝까지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비록 노천온천을 제대로 즐겨본 적은 없지만 스키야끼를 한 냄비 깨끗이 비운 지금만큼은 노천온천 속에 머리까지 푹 잠긴 기분이다. 밖은 아직도 눈바람이 불고 있는데 따뜻한 식당 안에서 뜨거운 전골을 먹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꽤 좋았다.
재료만 넣고 끓이면 되는 간단한 키트 같은걸 팔았으면 좋겠다란 생각도 잠깐 했다. 팔았는데 내가 못 보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지만. 근데 한편으론 자취방에서 걸어서 15분이면 가게가 있는데 굳이 키트를 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문득 궁금해졌다. 왜 한국엔 이런 메뉴가 없을까? 전골이 아직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안 맞나? 그렇기엔 안주로 전골을 즐겨 먹는 사람들도 꽤 있고. 한국은 아직까지는 추운 날엔 국밥이란 인식이 너무 강한 탓일까? 아니면 역시 된장이나 고추장 같은 전통 베이스에 비해 간장은 생소하게 느껴져서 그런 걸까.
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새로운 것'이 음식일 땐 두려움이 배로 되어 나타나는 듯한다. 그래서 새로운 음식 아이템은 전례가 없는 타지에서 성공하기 쉽지 않은데, 모츠나베나 샤브샤브 같은 경우 이미 한국에서 대중화되었지만 스키야끼는 아닌 것 같아서 아쉽기 짝이 없다. 한국 사람들도 이 맛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온 순간 찬 칼바람이 훅 불어와서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요 며칠 맨날 밀가루 튀김 이런 것만 먹다가 오래간만에 따뜻한 국물에 밥 든든하게 먹어서 정말이지 행복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스키야끼란 노천온천에 푹 담가져 노곤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찬 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확 들며 다시 현실 세계로 되돌아왔다. 빨리 집에 가서 난방 틀고 씻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 티비를 조금 보다 잠에 들고 싶었다.
그러나 목요일 저녁인 지금으로선 그럴 수도 없다. 내일도 어김없이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고, 책상 위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과제 더미가 쌓여있었다. 오늘의 일과는 마쳤으나, 아직 주말을 맞기엔 하루가 더 남아있는 어중간한 목요일의 해방감. 그래도 나는 어째서인지 이런 목요일 저녁만의 분위기가 좋다. 아주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또다시 찾아올 아침을 대비하여 남은 일을 해야만 하는 목요일 저녁. 어쩌면 우리 인생의 함축판은 목요일이 아닐까,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눈바람을 뚫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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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음식, 맛집 블로거가 아니며 매장 혹은 점주로부터 어떠한 대가를 받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일본에 단기 어학연수차 2달간 후쿠오카에 체류하면서 나름 최고의 식당을 찾아 떠난 극히 개인적인 체험담을 일기 삼아 브런치에 차곡차곡 담아보려 합니다. 이 곳에 올려진 그림은 제가 직접 그리거나 촬영하여 편집한 사진으로써 저의 사전 동의 없이 무단으로 도용하거나 퍼가시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