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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은혜를 갚아요, 당신을 위한 상품권

#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by 서점원


8월

03


서점 오픈 준비하던 때를 회상하면 어떻게 준비하고 결정했나 싶은 생각이 아직도 든다. 여전히 그때의 결정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으나 사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어떻게든 그 방식에 맞춰 살아간다. 그러므로 틀린 결정이란 없는 걸지도.


수없이 많은 걱정덩어리가 있었으나 그것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던 건 귀인을 만난 덕이다. 역시 인간은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D 님은 내 조카의 유치원 시절 친구의 엄마(사돈의 팔촌만큼 정말 머나먼 사이)인데 언니와 연락을 계속 이어와 소개받을 수 있었다. D 님은 손재주가 말도 안 되게 좋은 분이었다. 예전부터 재봉틀로 뚝딱뚝딱 온갖 것을 만들고, 셀프 인테리어에도 뛰어난 감각을 선보이셨는데 바쁜 와중에 서점의 공간을 친히 방문한 후 바로 진단을 내리셨다. 페인트칠 합시다.

당시 나의 눈에는 벽도 바닥도 멀쩡해 보여서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새로운 가구가 들어오면 벽을 손보지 않은 걸 백 프로 후회하게 될 거란 말을 듣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책장은 깨끗한데 벽과 바닥이 지저분하면 더러운 부분만 눈에 확 들어오겠지. 결론적으로 그녀의 말이 맞았으나 당시의 나는 페인트를 셀프로 칠한다는 것에도 의문을 품었다. 셀프로 무언갈 해본 적은 없다. 셀프는 물 정도뿐.

그럼에도 도전했다. 서점을 시작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못 할 것은 없었으니까. 페인트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색 배합도 좋다는 수입 페인트를 보러 가기로 했다(앞서 최초로 업로드한 01화의 내용이 이어진다).


페인트 역시 내가 한 것은 거의 없다. 결제만 했을 뿐 장비와 작업 일정 등은 모두 그녀의 결정에 맡겼다. 나는 흐흐 웃다가 가뿐하게 대답만 했다. 네, 좋아요.

그렇게 혹독한 셀프 페인트의 날이 다가왔다. 전문가인 D 님의 지시에 따라 더블유(W) 자를 그리며 롤러를 움직였다. 힘을 얼마나 주는지에 따라 더블유의 위쪽은 옅고, 아래쪽은 진해지기도 했다. 그 ‘적당히’를 찾아가며 칠하는 것이 페인트의 기술. 그러나 슬프게도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나는 끝끝내 그 기술을 익히지 못했다. 나의 언니 역시 노력은 가상했으나 얼룩덜룩한 자국을 남기며 우리는 각자의 존재감만을 과시했다.

D 님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그래서 셀프 페인트를 결정한 순간부터 본인이 이 공간의 페인트를 모두 마무리할 것이라는 미래를. 나는 그저 그녀가 좋아하는 음료를 물어보고 옆집 푸딩으로 당을 충전하고 이런저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우여곡절 끝(D 님과 찐 인테리어 전문가인 남편분까지 합세하여)에 서점의 벽면이 매끄럽게 마무리되었다. 그 외에도 조명 교체, 선반 고정, 싱크대 수전 연결 등 온갖 업무를 바쁜 와중에도 맡아 주셨다. 이렇게나 도움받아도 되는가, 로 많이 고민했다. 동시에 그들에게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현금과 선물 등 수많은 대안이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도 이 어마어마한 도움에 상응할 만한 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서점을 위해 애써주셨으니, 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렇게 상품권을 제작했다. D 님의 딸이자 조카의 유치원 친구인 D 양을 위해. 중학교 2학년인 그녀를 위해 상품권을 만들어 선물했다. 언제든 서점을 찾아와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전용 상품권.


상품권을 선물한 지 몇 달이 지났으나 그녀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그녀,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는 그녀를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난 몇 번의 독촉 아닌 독촉 메시지를 보냈고, 마침내 서점 오픈 후 4개월 만에 그녀가 이곳에 왔다.

남자 조카만 있어서 그런지 D 양을 마주하고는 반갑고 귀엽고 그러했는데 그녀는 정말 책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단 만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열세 살의 여름> 같은 상큼한 이야기부터 읽으면 조금은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면서.


지금, 이 글을 다시 수정하고 있는 지금(11월) 그녀는 여전히 서점에 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난 매달 그녀가 좋아할 만한 책 한 권을 선물하는 걸로 작전을 바꿨다. 일단 이번 달은 <14살부터 시작하는 나의 첫 진로 수업>이다. 일본 서적이라 문화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진로 고민하는 건 어디든 다 똑같으니까. 그녀가 이 책을 읽고 다시금 서점에 발걸음하길 바라며.



2025년 8월 16일 토요일

그녀의 방문을 기다리다 지친 서점원



서점원의 문장과 책

: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없어도 괜찮아!


『14살부터 시작하는 나의 첫 진로 수업』 학연플러스 편집부 지음, 김신혜 옮김, 뜨인돌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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