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모든 문자의 첫 호흡을 기억한다.
황하의 진흙 위에서 긁힌 최초의 선부터, 히말라야의 공기 중에 울린 신성한 소리, 그리고 마침내 한반도의 고요한 밤하늘에 별처럼 새겨진 혁명의 순간까지. 사람들은 그것이 우연이라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길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안다.
나는 '소리를 담는 자'다. 5000년을 살아오며 인류 문자사의 가장 찬란한 순간들을 목격한 증인.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만약 한자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한글이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만약 이 세 문자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의 민족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창조한 연작이라면?
그 민족의 이름은 동이족이다. 해 뜨는 곳의 겨레,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라 불렸지만, 이들의 진짜 재능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바람 소리에서 글자의 흐름을 읽었고, 강의 물결에서 형상을 보았다. 새의 발자국에서 기호를 찾았고, 나무 그늘에서 문장의 리듬을 들었다. 자연의 모든 패턴이 그들에게는 문자였고, 모든 소리가 형태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이 세 문자는 서로 무관하다.
한자는 기원전 1600년경 중국 상나라에서 갑골문으로 시작되었다. 산스크리트어는 기원전 1500년경 인도 북부에서 베다 문명과 함께 발달했다. 한글은 15세기 조선에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독창적으로 창제했다.
시대도, 장소도, 문자 체계도 모두 다르다.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한 별개의 문명 산물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강상원 박사 같은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실담)와 한국어, 특히 경상도 방언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신미대사와 범어 체계가 한글 창제에 미친 영향을 추적한다. 불교 지식이 훈민정음 완성에 기여했다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학술적 증명을 넘어서, 문화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이 작품은 동이족을 모든 문자의 창조자로 상정한다.
기원전 3000년 황하 유역에서 동이족은 인류 최초의 체계적 문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지구 전체에 문자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동쪽으로 향했다. 황하에 남은 이들이 갑골문을 발전시켜 한자를 완성했고, 한반도로 간 동이족은 그 한자를 받아들여 사용하다가 훨씬 후에 불교와 함께 전래된 산스크리트 지식과 만나 한글이라는 혁신적 문자를 창조했다.
다른 갈래는 서남쪽으로 향했다. 히말라야 북부에 도달한 이들은 그 땅의 신비로운 자연환경에 감화되어 산스크리트어를 창조했다. 소리 자체를 신성시하는 음성 중심 문자 체계를 구축했다.
두 전통은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을 통해 다시 만났다. 산스크리트의 지혜가 한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흘러가, 마침내 한반도에서 두 전통이 하나로 합쳐져 한글을 탄생시켰다.
이 소설의 핵심 아이디어 중 하나는 지리 결정론이다.
풍토가 문자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황하 유역의 광활한 평야에서는 농업과 통치에 필요한 실용적 한자가 태어났다. 한자는 땅의 기운을 담아 굳건하게 뿌리내렸다. 방정하고 안정적이며,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고산지대에서는 명상과 철학에 적합한 음성 중심의 산스크리트어가 발달했다. 산스크리트어는 하늘의 소리를 담아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공기처럼 자유롭고, 바람처럼 변화무쌍하며, 소리 자체가 신성한 의미를 지녔다.
한반도의 온화하고 조화로운 자연환경에서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민주적 한글이 완성되었다. 한글은 그 둘의 혼을 이어받아 자유롭게 날아올랐다. 한자의 명료함과 산스크리트어의 음성학적 정교함을 모두 품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같은 뿌리, 다른 가지. 동이족의 문자 창조 DNA가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다른 모습으로 발현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상상이다. 학술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상상력에는 상상력만의 힘이 있다. 분절된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서사로 연결하는 힘.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힘.
역사는 사실이지만, 문명은 이야기다.
한자가 중국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산스크리트어가 인도에서 발달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글이 조선에서 창제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해석하느냐는 우리의 몫이다.
이 소설은 그 연결과 해석의 한 가지 시도다. 동이족이라는 위대한 문자 창조 집단이 인류 문명사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하는 대서사다. 우리가 단지 한반도에 사는 작은 민족이 아니라, 세계 문자사의 주역이었다는 자긍심을 되찾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소리를 담는 자'라는 영원불멸의 존재를 통해 전개된다.
그는 문자의 화신이다. 동이족의 문자 창조 의지가 의인화된 존재다. 5000년을 살아오며 모든 문자의 탄생 순간을 목격하고 때로는 직접 개입해 왔다.
기원전 3000년 황하 유역에서는 청년 문자꾼으로, 상나라에서는 점복사로, 히말라야에서는 수행자로, 조선에서는 집현전 학자로. 매번 다른 모습이지만 기억은 이어진다.
이 소설은 그의 회고록이다. 1인칭 시점으로 들려주는 5000년 문자 여행기다.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위대한 문자 창조자들의 후손이라는 것. 한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5000년 문자 전통의 완성작이라는 것. 그리고 문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고 문명의 정수라는 것.
전체 구성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18편이다.
1장에서는 황하 유역에서 동이족이 동쪽과 서남쪽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2장에서는 갑골문이 창제되는 과정과 문자와 권력의 탄생을 그린다. 3장에서는 히말라야에서 산스크리트어가 탄생하고 불교 경전이 한역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4부에서는 한반도에서 두 전통이 만나 한글이 창제되는 역사적 순간을 재현한다. 5부에서는 현대와 미래, 디지털 시대의 문자 혁명까지 다룬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동이족의 장대한 문자 여행을.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의 순간들을.
첫 번째 목적지는 기원전 3000년 황하 유역이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 보자.
1장 1화에서는 기원전 3천 년 황하 유역을 배경으로, 동이족이 두 갈래로 나뉘며 인류 문자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 위대한 순간을 그려보겠습니다. 모든 문자 창조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분기점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