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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1화 숫자에 가려진 감정들

Part I. 일하는 나 : 일은 잘돼도, 감정은 외면받았던 시간들

by 이로우미

"쟤, 왜 저렇게 싸가지가 없냐?"



20대 후반쯤이었나...

한 직원이 급여명세서를 손에 들고 얼굴이 붉어진 채 내 방으로 들어와 따져 묻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부사수 한 명과 함께 '관리팀' 표지판이 붙은 작은방을 쓰고 있었다.)

이유는 건강보험료가 지난달보다 많이 나왔다는 것.

나는 먼저 급여명세서를 확인해 작업실수가 없는 걸 점검한 뒤, 인상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직원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언성을 높이며 집요하게 따졌고,

나도 단호한 태도로 맞서며, 문제가 없음을 재차 설명했다.

결국 직원은 납득했지만, 방 문을 나서며 밖의 동료에게

"쟤, 왜 저렇게 싸가지가 없냐?"

라는 말을 일부러 들으라는 듯 툭 내뱉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함께 일하는 부사수 앞이라 더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그 직원과 친한 동료들도 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르 웃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언제부턴가 잘 웃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스물네살 처음 회계일을 시작한 후 대부분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았다.

회계, 총무, 인사, 급여... 소위 백오피스라 불리는 거의 모든 관리 업무를 총괄했다.

업무는 빠르게 익혀야 했고, 실수 없이 처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그런 환경에선 작은 실수 하나도 '태도'로 연결되기 쉬웠으니까.


반복되는 질문, 거듭되는 요청에 기계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건,

그저 효율 때문만은 아니었다.


친절함은 때때로 사적인 부탁을 부르고,

정중함은 분명히 해야 할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덤덤하게, 감정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내 표정과 말투는 조심스러워졌고, 나의 감정은 점점 숨기게 되었다.


같은 부서에 누군가라도 있어 퇴근 후 서로 푸념이라도 나누고 의지했다면 달랐을까?

나는 늘 혼자였고, 그만큼 말수도 적어졌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모든 부서와 일하지만, 그 누구와도 어울리기 힘든 자리’에 있었다.


정확함이 최선이었고, 실수하지 않는 게 방패였다.

감정은, 그저 귀찮은 여지로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간이 쌓여 갈수록, 나도 나를 잊어갔다.

일을 잘한다는 건 무던해지는 것, 감정을 숨기는 것, 날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 믿었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버틴 날들 속에서 나는 '사람'보다 '기능'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퇴사 후 시간이 흐른 뒤, 예전 동료들과의 만남에서 종종 듣는 얘기가 있다.


"예전에는 표정이 없어서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웃음이 참 많네요"

"감성적인 사람이군요"

"예전하고 분위기가 많이 바뀐거 같아요"


이런 말을 들으면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 한쪽이 아릿하고, 오래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던 학창 시절의 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웃고, 사소한 일에도 설레던 그 평범한 소녀.


그 모습은 사라진 게 아니라,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 동안 일은 잘 진행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 감정들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묻혀 있던 시간들이었다.



숫자 뒤에 감춰진 나의 마음.

잘 웃지 않던 내가, 사실은 웃고 싶었던 사람이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나 자신에게도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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