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러시아 지도를 펼칠 때마다 묘한 긴장감과 경외심을 느낀다. 유럽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선은, 우랄산맥을 넘고 시베리아를 지나 태평양에 닿는다. 눈앞에 놓인 지도 한 장이 실제 세계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낯설고도 장엄하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제국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품고 있다. 서쪽으로는 유럽의 심장부에서 독일, 폴란드와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우리나라와 태평양을 향한다. 북쪽으로는 얼음의 바다, 북극해가 있고, 남쪽으로는 코카서스(캅카스) 산맥과 중앙아시아의 거친 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처럼 사방이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러시아의 땅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을 결정해 왔다.
러시아는 내륙의 중심에서 바다까지 가장 먼 대륙국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안선을 가진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그 해안선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발트해, 흑해, 북극해, 태평양, 카스피해 등 러시아가 접한 바다는 대부분 얼음에 덮이거나 좁은 해협에 갇혀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역사 내내 "부동항"을 찾아 전쟁을 해왔다. 북서쪽의 무르만스크는 유일하게 연중 항해가 가능한 항구이며, 러시아 북방함대의 근거지다. 흑해의 세바스토폴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며 사수한 부동항으로, 수세기 동안 *오스만제국, 나폴레옹, 독일의 나치, 그리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다퉈온 요충지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크림반도를 병합한 이유도, 결국은 따뜻한 바다로의 출입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러시아의 해안 전략은 언제나 군사력과 맞닿아 있었고, 해안선은 단순한 경계선이 아닌 전쟁의 출발점이었다.
* 오스만 제국 : 튀르키예에서 건국, 불가리아 등 발칸 반도, 시리아 등 중동,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 1299~1922년.
내륙으로 들어가면, 러시아는 거대한 산맥들과 고원, 광활한 평원으로 나뉜다. 우랄산맥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등줄기이자 러시아의 방어선이다. 남쪽에는 코카서스(캅카스) 산맥이 벽처럼 서 있고, 중앙아시아와 만나는 알타이산맥은 또 다른 문명의 문턱이다. 이 산맥들은 러시아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왔지만, 동시에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자신을 확장하고 방어하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이 영국과 경제 전쟁을 위해 대륙 봉쇄령을 선포하였으나 이를 어기고 영국과 밀무역하는 러시아를 징벌하기 위해 모스크바까지 진격했을 때도, 결국 러시아는 자신의 땅을 무기로 삼았다. 혹한과 장거리로 인한 보급의 붕괴, 거대한 산맥과 광활한 지형에 걸린 적은 더 이상 싸우지 못했다. 1941년, 히틀러 역시 같은 오류를 범했다. 동유럽을 지배하고 러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침공하였으나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러시아 평원과 산맥의 깊은 품 속은 수많은 독일 병사를 삼켰다. 이처럼 러시아의 지리는 적을 유인하고 지치게 하며, 그 깊이와 추위로 적을 멈추게 하는 전략의 일부였다.
러시아의 강과 운하는 또 하나의 지리적 유산이다. 볼가(Volga) 강은 유럽 지역에 있는 러시아의 심장을 흐르며, 다뉴브와 카스피해, 발트해를 연결한다. 오비(Ob), 예니세이(Yenisei), 레나(Lena) 강은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며 자원과 사람을 실어 나른다. 이러한 강들은 단지 교통로가 아니라, 군사적 수송망의 핵심이다. 나폴레옹 전쟁과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는 수로를 통해 병력을 이동시키고, 식량과 장비를 운송했다. 러시아는 강을 따라 요새를 세우고, 강을 따라 적을 멈추게 했으며, 운하를 통해 동서남북을 연결했다. 그 거대한 수로망은 내부를 튼튼히 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패였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는 북극을 주목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북극해의 얼음을 녹이고 있으며, 러시아는 북극권을 새로운 전략적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석유와 가스, 희귀 자원이 묻힌 그 땅은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와의 새로운 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특히, 북극해항로는 러시아동쪽 끝 알래스카와 마주한 베링 해협을 지나 북극해를 따라 유럽과 연결된 해로로 러시아에게 있어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으로 가장 빠르게 잇는 길이며,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바다로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오늘, 우리는 다시 지리의 힘을 목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완충지대이며, 흑해와 동유럽 평원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나치 독일, 소비에트 연방 등 수많은 제국들이 경쟁한 무대였다. 러시아는 이 지역을 '근접 외국(Near Abroad, 소련 해체 이후 독립된 공화국을 지칭하는 말, 러시아는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으로 간주해 왔으며, 이 지역이 서방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안보적 위협으로 여겨 왔다.
지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동쪽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어 러시아의 중심부로 진입하기 쉬운 통로'이며, '서쪽으로는 유럽으로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특히 드니프로 강은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가르며, 군사적으로도 자연적인 전선 역할을 한다. 이 강의 동쪽은 산업 지대는 러시아어 사용자 비율이 높고, 서쪽은 유럽적 정체성이 강한 지역이다. 이런 공간적 균열은 결국 정치적 균열로 이어졌고, 분쟁의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분열을 이용해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의 병합은 세바스토폴의 부동항을 확보함으로써 러시아 흑해 함대의 원활한 작전 보장과 함께, 서방이 점차 우크라이나로 다가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어진 우크라이나 동쪽 끝 돈바스 지역의 무장 충돌과 2022년의 전면 침공은, 러시아가 서방 세력의 동진을 '지리적 포위'로 받아들였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니라, 유럽의 지형적 균열과 전략적 상호의존 속에서 발화된 충돌이다. 과거 냉전 시기처럼, 러시아는 다시 한번 지리적 방어선을 강화하려 하며,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안보지대'를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벌어진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잃게 하고, 유럽 전체의 안보 구조를 뒤흔들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는 어디로 향할까. 나는 그 해답 또한 지리에서 찾는다. 러시아는 동진 정책을 통해 극동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고, 북극권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서쪽 국경은 방어선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며, 남쪽에서는 중앙아시아와의 에너지 협력을 통해 지경학적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러시아는 지금도 여전히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이 가진 바다, 산, 강, 얼음의 세계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리는 정체성이자 전략이며, 동시에 생존의 방법이다. 지도 위의 선 하나가 수많은 생명을 바꾸었고, 지형 하나가 제국을 만들고 무너뜨렸다. 러시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늘도, 그 광활한 땅 위에 병력을 배치하고, 강을 따라 도시를 세우고, 북극의 얼음을 깨며 미래로 향한다. 이것은 단지 땅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지리가 만든 제국이 어떻게 전쟁과 평화를 끌어안는지를 보여주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