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세요? 저는 P인데요.

by 마른틈

나도 한때는 J처럼 굴던 날이 있었다. 아마도 흐린 기억 속 전 남친과 함께하던 여행에서 시간대별로 빼곡하게 채우던 일정이 그랬고, 그 이후에는 하필 원했던 맛집이 가는 날이 장날이라 1박을 더해야 한다고 우기던 날도 있었다. 허나 대체로 내 여행계획은 늘 어그러지는 편이었으며, 그렇기에 나는 늘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여행 계획 같은 것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냥 바다 보고 싶으면 강릉을 가고, 거제도를 갔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발견한 한적한 카페에서 달콤한 수플레를 움푹 찔러 베어 물고, 쌉싸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바닷바람을 맞으면 행복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합리화일 뿐, 보통의 계획형 인간들은 나와 같은 인간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계획이 어그러지면 매우 스트레스를 받기에, 얼마쯤은 느긋한 나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여행을 가기로 했을 때 사실 걱정스러웠다. 한 달도 전부터 숙소예약을 끝내놓고 기차표의 티켓팅날짜까지 기억했다가 내 몫까지 선결제해놓는 솜씨를 보니 영락없는 계획형 인간인 것이다.

아, 나는 사실 남이 해주면 편하지. 그렇지만 저 언니는 여행이 끝나고 나를 손절할지도 모르겠는걸ㅡ


“옷은 당일날 입고갈 거고, 다음날 입을 거만 챙기면 되잖아 짐 뭐.. 필요한가?”

“잠옷 챙겨야지. 헐벗고 잘 거야?”

“오 맞다. 고마워”


역시 계획형 인간들은 함께 있으면 편하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하여튼 그렇다.


출발 전날 예기치 않게 기분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나는, 짐만 싸고 일찍 자려던 원래 계획과는 달리 끝내 “한 잔만 하고 잘게..”라는 선언을 해버리고 마는데 이에 등골이 서늘해진 그녀는, 차마 그 안쓰러운 마음에 말리지는 못하고 알람은 꼭 맞추고 무음을 풀고 자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건대 나는 두 잔 마시고 잠들었다. 그 잔이 좀 컸던 건 비밀이다.


음주 다음날은 꼭두새벽부터 눈을 뜨는 편인 나는 새벽 4시 50분에 기상했고, 조심스럽게 카톡으로 생존확인을 하던 그녀와 정확히 눈이 마주쳐서는 우리는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런데 씻느라 응답이 없던 내가 자못 불안했는지, 그녀는 그새벽 기어이 나의 남편까지 기상시켰다. 뒤늦게 카톡을 확인한 나는 아연하고 말았다.

내가,,,내가 미안해,,,


하여간 나는 이 여행의 시작부터 그녀의 마음에 불신을 잔뜩 쥐어준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주 정확한 시간에 약속장소로 향했다. 우리는 아주 여유롭게 기차역에 도착했다.


“언니 내가 P라 불편하지? 미안해”

“아냐 나는 내 계획에 암말 없이 잘 따라와 주기만 하면 너무 좋아”

“나 그건 진짜 잘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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