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마가 아니라 키보드를 두른 엄마
딸아이가 다섯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 나 바보래…
엄마는 밥 하는 거라고…
컴퓨터 하면 안 된대…”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엉엉 울며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역할놀이 시간에 ‘엄마 역할’을 하며 컴퓨터를 했더니,
친구들이 놀렸다고 했다.
“바보야, 엄마는 밥 하지, 컴퓨터는 안 해!
이제 너랑 안 놀아.”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가 본 ‘엄마’는
늘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조리대 앞이 아니라, 앞치마 대신
프린터와 키보드 앞에 있는 모습 말이다.
그 작은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바보’라고 놀림받았다는 사실이
왠지 미안하고 아프게 다가왔다.
그날 저녁,
나는 앞치마를 꺼내 두르고
딸과 함께 수제비를 만들었다.
반죽을 치대고,
작은 손으로 반죽을 떼어 국물에 넣으며
딸은 한껏 신이 났다.
“우리 엄마는 수제비도 잘해!”
아이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진짜 엄마’가 되기 위해,
작은 증명이라도 해 보이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현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야 했고
보고서를 쓰고, 메일을 보내고,
가끔은 아이 몰래 울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이제 딸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딸이 툭 던지듯 말했다.
“엄마, 난 그런 엄마가 너무 자랑스러워.
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엄마 일하고, 공부하는 거 멋지다고 해.”
순간,
그 수제비 반죽처럼
마음속 깊이 무언가 몽글몽글 퍼져나갔다.
그때 왜 그렇게 미안했을까.
왜 그렇게 죄책감을 가졌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나다움’과 ‘엄마다움’을
같은 줄에 세우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수제비를 만들던 그 시간도,
컴퓨터 앞에서 일하던 내 모습도
모두 엄마의 진심이었는데 말이다.
그땐 몰랐다.
나다운 삶을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이
오히려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는 것을.
부엌이든 책상이든,
아이에게 중요한 건
‘내 엄마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나와 함께 있는가’였다.
나답게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로 아이는 배우고 있었다.
그러니 아파하지 말자.
아이들은 결국
자라면서 그 진심을
천천히 알아차리게 된다.
나다운 모습으로,
그 자체로 괜찮다.
지금처럼 살아내는 나의 하루가,
이미 충분히 멋지다.
그것이,
부모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