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아른 괴담록
첫 번째,
서있는 남자.
어느 날 저녁, A 씨는 집 앞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맑은 날인데도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있었다.
우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 서서 아무 곳도 없는 곳을 향해 가만히 서 있는 건 확실했다.
좁은 골목길. 어쩐지 말을 걸고 싶지 않았기에 A 씨는 몸을 비틀어 닿을랑 말랑하게 남자의 옆을 빠져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골목길을 빠져나왔을 때. 찰박. 물웅덩이를 밟았다. 신발이 젖었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자리에 작은 웅덩이들이 발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이렇게 맑은 날에. 어쩐지 소름이 돋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찰박 찰박 찰박.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창가로 가서 아까 그 골목 쪽을 넘겨다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이쪽을 향해서. 아까도 저 방향이었던 건가?
모르겠다. 귓가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다. A 씨는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 잠이 들었다. 밤사이 귓가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목이 마르다. 자꾸자꾸 목이 마르다.
한밤중에 A 씨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어두운 거실에서 자기도 모르게 창가 쪽을 돌아보았다.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다. 불을 켰다.
창가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선명하게 비쳤다. 깜짝 놀라서 다시 불을 껐다. 창가에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경찰에 신고할까. 이상한 남자가 집 앞을 서성거린다고. 전화기를 손에 쥐었을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까 불을 켰을 때. 창밖은 밤이었고 거실 안은 밝았다.
그렇다면. 창가에 비친 것은.
창밖의 풍경일 리가 없다.
찰박찰박.
두 번째,
소개팅
B 씨는 소개팅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어느 카페의 창가 자리에서였다.
여자는 아주 밝은 성격에 잘 웃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B 씨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B씨도 여자가 마음에 들었기에 여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책에서 읽은 어려운 이야기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웃기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밝게 하기도 했다.
여자는 굉장히 B 씨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고 푹 빠져들었다. 반응도 적극적이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B 씨는 너무 신이 나서 이번엔 가장 자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역시 여자는 이번에도 굉장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엔 소름 돋는다는 듯 부르르 떨기도 하고, 중간엔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남자는 혼을 실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자는 딱딱하게 굳어서 얼어붙어 있었다. 숨도 쉬지 않고, 어느새 눈물만 흘리면서.
이야기가 다 끝나자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B 씨는 화장실 쪽을 바라보며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돌아오면 해줄 무서운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2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걱정이 된 B 씨는 화장실로 다가가 괜찮냐고 물으며 문을 노크했다.
그 순간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 번, 또 한 번.
카페 점원이 달려와 문을 땠을 때 여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목을 커터칼로 그었다. 나중에 달려온 경찰이 조사한 바로는 자살이었다. 그녀가 목을 그은 시각은 B 씨가 노크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한다.
세 번째,
산책
카페거리 근처에 사는 C 씨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고 빗소리가 적당한 그런 날엔 카페거리를 걸어 다니며 산책을 한다. 도로변에 옹기종기 모인 카페들의 알록달록한 풍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카페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중인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언제나 비슷비슷한 풍경이지만, 사랑스러운 일상이다.
하지만 딱 한 번 C 씨는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어느 카페의 창가 자리에서 젊은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고 여자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남자의 안색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세 가지 이야기
D 씨는 맑은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비 오는 날을 골라서 외출한다. D 씨에게 그런 습관이 생긴 것은 '우산을 쓰고 서 있는 남자'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은 이후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D 씨는 가끔 맑은 날에 우산을 쓴 남자를 마주치곤 했다고 한다. D 씨가 비 오는 날을 골라 외출하는 것은 그래서다.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쓴 남자가 있어도 무섭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