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들의 은밀한 로망
LG 다니던 시절.
20대 초중반, 인생에서 제일 깔롱직이던 그 시절.
성과급을 받아 1년에 한 개씩 명품 가방을 사모으고,
향수는 샤넬로 칙칙 뿌리고,
하이힐 12cm는 기본으로 신고 다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외모 전성기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웨이브 머리에,
갸름한 얼굴, 여리여리한 몸매.
그땐 진짜…
밖에만 나가면
뒤에서 슬쩍 따라오며 번호 묻는 남자들이 꽤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서 내심 자신감도 있었다.
‘나 꽤 괜찮게 생긴 편이구나’ 하는.
딱히 연예인급은 아니어도,
누가 봐도 호감형이네.
그 정도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외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긴 로망이었다.
잘생긴 내 남동생이랑
애인인 척, 팔짱 끼고 시내를 걷는 거다.
청바지 매장 같은 데 들어가서
서로 옷 골라주고, 계산도 내가 척척 하고,
사람들이
“어머, 누구야? 커플인가?”
헷갈리게 만드는 그런 장면.
그냥 한 번쯤,
훈훈한 비주얼 커플로 보여지고 싶었던 거다.
서준이가 군대 다녀오더니
애티도 빠지고,
몸도 커지고,
얼굴도 또렷해지고.
‘지금이다!’ 싶었다.
나는 이미 사회생활 중이었고,
돈도 벌고 있었고,
타이밍도 완벽했다.
그날, 서준이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나는 흰티에 부츠컷 청바지에 하이힐,
서준이는 핑크셔츠에 흰색 데님에 하얀 스니커즈.
내가 먼저 팔짱을 슥 꼈다.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속으로 좀 설렜다. 진심.
청바지 매장에 들어갔다.
“이거 어때?” “저건 어때?”
하나하나 골라주고,
계산도 당연히 내가 다 했다.
완전 알콩달콩한 애인 모드였다.
내가 리드하고,
내가 스타일링 해주고,
내가 돈 쓰고.
그날 나는,
내 동생이 아닌,
내 남자친구랑 데이트 중이었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근데
직원이 다가오더니 이러는 거다.
“어머~ 남매시죠?
진짜 너무 닮았다~
근데 동생 너무 잘생겼어요~ 미남이네~”
“와~ 몸도 좋다~ 헬스 하는갑다~”
……
잠깐만요?
누가 옷 골라주고,
누가 계산하고,
누가 향수까지 뿌려줬는데—
왜 서준이만 주인공이죠?
가는 매장마다
직원들은 전부 서준이만 칭찬했다.
“동생 너무 잘생겼어요~”
“와~ 언니야, 동생 잘생겨서 좋겠다~”
“두 분 남매 맞으시죠? 너무 닮았어요~”
그 와중에 남매라는 건 또 어찌나 단박에 알아보는지.
‘남자친구인 척’ 하고 싶었던 내 로망은
시작도 전에 철저히 박살 났다.
단 한 사람도, 단 한 번도 헷갈리지 않았다.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내가 누군데…”
“돈은 내 지갑에서 나가는데…”
“왜 다들 서준이만 쳐다보고 있노…”
기분이 확 상했다.
몰입해 있던 로망에서 쫓겨난 느낌.
그게 창피했고, 괜히 민망했고,
애써 준비했던 하루가 허무했다.
참고 또 참았다.
바지만 산 게 아니었다.
셔츠, 신발, 향수까지.
풀코스로 내가 다 해줬다.
하루쯤은,
내 동생이
내 남자친구처럼 보였으면 했다.
사람들이 진짜 커플인 줄 착각해 주길,
한 번쯤은 그럴듯한 오해를 해주길 바랐던 거다.
그런데 모든 칭찬이 서준이한테만 쏠리니까,
솔직히 그게 좀 배알이 꼴렸다.
어쨌든, 내 로망은 산산조각 났고,
나는 연인으로 보이고 싶었고,
세상은 나를 서준이 누나라 불렀고,
나는 결국… ATM이었다.
집에 오는 길.
서준이는 옆에서 폰만 보고 있었고,
나는 슬쩍 팔짱을 뺐다.
말도 섞기 싫었다.
분명 아무 일도 없었는데,
혼자만 시나리오를 짜고,
혼자만 기대하고,
혼자만 깨진 하루였다.
그 뒤로는,
서준이랑 단둘이 시내에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