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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교육의 시작은 학교였다.

근대디자인사 #10. 바우하우스(Bauhaus)

by 공일공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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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을 함께 가르친 최초의 학교'였다.


1919년 독일 바이마르.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새로운 학교를 열었다. 이름은 바우하우스(Bauhaus), 뜻은 “짓는 집”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은 건물은 단순한 벽돌 건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 언어였다.

그로피우스는 예술가와 장인을 한 공간에 모아, 아름다움과 실용을 함께 배우는 교육을 시작했다. 그림과 공예, 건축과 기술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실험되는 이 방식은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시도였다.




왜 ‘학교' 였을까?


바우하우스 이전까지 디자인은 따로 배우는 게 아니었다. 장인은 도제식으로 기술을 익혔고, 예술가는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20세기 초, 산업화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기계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 안에서 인간적인 감각은 사라졌다. 그로피우스는 묻는다. 기계와 예술이 만나려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그의 답은 학교였다.


예술가와 장인,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한자리에 모여 함께 배우고, 함께 실험하는 교육의 장. 바우하우스는 그렇게 세워졌다.




바우하우스 수업 ― 공방과 실험실


바우하우스에서는 학생들이 처음부터 물감을 들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먼저 색과 형태의 기본을 배우고, 이어서 금속·목공·직물 같은 공방에서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머리로만 배우지 않고 손으로도 배우는 곳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쓸 수 있는 가구, 건축, 생활 도구를 만들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의 의자와 건물은 지금 봐도 세련되고 실용적이다.


ddbaca6fd2c59.jpg Bauhaus Weimar, ca. 1920–23, Werkstätten, Foto unbekannt.




디자인은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화려한 건축물도, 유명한 가구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디자인은 삶을 위한 것"이라는 철학이었다. 가볍고 튼튼한 강철 의자, 햇빛을 고려한 창문 설계, 단순하면서도 조화로운 그래픽. 모두가 일상생활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고민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https://www.axismag.jp/posts/2020/09/275004.html)
06639e83349a1.png (https://www.axismag.jp/posts/2020/09/275004.html)




바우하우스 이후, 디자인 교육의 표준이 되다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압박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철학은 미국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예일, 하버드, 울름조형학교 등 현대 디자인 교육기관의 기본 틀은 바우하우스에서 비롯되었다.오늘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이유, 커리큘럼에 ‘이론+실습’이 함께 들어 있는 이유는 모두 여기서 출발했다. 바우하우스는 디자인을 장인의 기술이나 예술가의 취향에 맡기지 않고, 사회가 함께 배우고 발전시켜야 할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6a4efbabbc927.jpg https://www.faz.net/aktuell/feuilleton/debatten/




학교는 실험실이었다


“디자인 교육은 왜 학교에서 시작되었을까?”라는 질문의 답은 단순하다. 학교야말로 다양한 사람이 모여 함께 실험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건물이나 의자보다 더 큰 유산을 남겼다.


디자인을 배우는 방식 자체를 바꾼 것이다.


오늘날 디자인 학교의 스튜디오 수업, 프로젝트 기반 학습, 팀워크와 실습 중심 교육은 모두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된 실험의 연장선이다. 학교는 여전히, 디자인을 배우고 시험하는 가장 좋은 실험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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