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없다면 디자인도 필요 없다.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다.

by 공일공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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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형태’가 아니라 ‘맥락’에서 생긴다

디자인은 흔히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물로 평가받지만, 그 출발점은 늘 문제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문제란, 단순히 고장이나 오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구조, 낯선 관계, 불편한 감정, 전해지지 않는 메시지 같은 더 미묘한 수준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이 로고는 뭔가 어색해”, “이 앱은 쓰기 불편해”, “이 포스터는 눈에 안 띄어”라고 말할 때, 사실은 기능의 실패보다 맥락의 불일치를 겪고 있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이처럼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문제를 ‘시각 언어’로 정의하고, 풀어내는 것이다. 시각디자인은 단지 꾸미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정보, 관계를 조율하는 일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시각디자인의 4단계


시각디자이너가 마주하는 문제는 대개 불편하지만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시각디자인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감각적인 동시에 전략적이다. 감정과 정보를 함께 다루어야 하며, 사용자의 맥락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 복합적인 사고 흐름은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정리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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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 발견: “뭔가 이상해”라는 말에서 출발
눈에 띄지 않음, 복잡함, 어색함 같은 감각적 불편함을 감지하는 단계다.

· 시각적 정의: 감정과 정보를 시각 언어로 정리
‘왜 이상한지’를 언어화하고 시각적으로 설명 가능한 상태로 바꾼다.

· 시각 구조화: 정보의 흐름과 구성 요소를 설계
타이포, 색상, 이미지 배치 등 실제 시각 요소들을 전략적으로 조직하는 단계다.

· 행동 유도: 사용자 관점에서 결과물 완성
누가, 언제, 어디서 볼지를 고려해 설계 방향과 최종 출력을 결정한다.


시각디자인은 사람의 맥락과 감정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전략적 설계 행위이다.




시각디자인이 다루는 네 가지 문제


① 인지의 문제: 정보는 있지만, ‘보이게’ 설계되지 않은 경우

7300c788a1d5b.png (출처 : https://seoul.craigslist.org/)

Craigslist는 미국의 대표적인 커뮤니티 기반 플랫폼이다. 중고 거래, 부동산, 일자리 정보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시각 구조의 부재로 인한 인지 장벽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전체 화면은 텍스트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글자 크기·색·간격 등 시각적 위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용자 흐름을 유도할만한 시선 설계도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사용자는 정보를 읽기 전에 먼저 해석해야 하며, 텍스트는 많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인터랙션 또한 명확하지 않아 탐색 중 혼란이 발생하기 쉽다.


디자인의 목적이 정보를 '보이게' 만드는 일이라면, Craigslist는 정보 자체는 전달했지만 시각적 인지 구조 설계에는 실패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례는 단순한 스타일 문제를 넘어서, 사용자의 인지 흐름을 고려하지 않은 구조 설계의 한계를 보여준다.




② 감정의 문제: 공감되지 않거나, 낯설고 멀게 느껴질 때

1fbe94239bb60.png (출처 : https://www.l-e-a-p.com/work/crucials)


이 제품은 갈릭 마요, 스파이시 마요처럼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부드러운 소스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시각 언어는 제품이 말하는 정서와 다르게 설계돼 있다.


타입은 굵고 각지고, 색은 강하고 날카로운 원색 계열이며, 전체 분위기는 마치 자동차 용품 혹은 스포츠 에너지 드링크를 연상시킨다.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부드럽고 친근한 식감’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전달되는 셈이다. 이처럼 제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디자인이 말하고 있는 어조 사이에 감정선의 충돌이 발생한다. 결국 제품은 인식되지만, 사용자는 공감하지 못한 채 멀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문제다. 말하고 있는 내용을 디자인이 반영하지 못할 때, 정서적 설득은 실패하게 된다.




③ 정체성의 문제: 브랜드나 주체의 태도가 일관되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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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GAP은 세리프 타입의 로고를 사용하며 고전적이고 안정적인 브랜드 톤을 유지해왔다. 패션 브랜드로서의 정체성과 고객의 기억 또한 여기에 축적되어 있었다.


하지만 2010년 10월, GAP은 갑작스럽게 산세리프 타이포에 작은 그라디언트 정사각형을 더한 새로운 로고를 발표한다. 새 로고는 기존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고, 디지털 시대에 맞춘 감각적 리브랜딩을 의도했지만 브랜드 정체성과 시각적 태도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고객들은 이를 즉각적으로 거부했고, 6일 만에 브랜드는 기존 로고로 회귀하게 된다.


이 사례는 ‘디자인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브랜드가 자신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놓쳤기 때문에 실패한 리브랜딩이다. 결국, 정체성의 문제란 “예쁘냐”보다 “이 브랜드답냐”의 문제다. 디자인은 변할 수 있지만, 브랜드의 태도는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④ 관계의 문제: 사용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혼잣말 같은 디자인


9a65740ca6d98.png (출처 : https://www.goodreads.com/)


이 플랫폼은 독서 기록과 감상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서비스다. 겉보기엔 사용자 간 취향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공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사용자 경험은 ‘함께 있음’보다 ‘혼잣말에 가까운 기록’으로 설계되어 있다.


관계를 맺는 기능은 있지만, 정작 관계가 만들어지는 흐름은 없다. 서로의 감정에 반응하거나, 취향이 교류되는 장치는 부족하고 개인의 관심사는 타인과 연결되기보단 기록된 데이터로만 남는다. 결국 이 서비스는 관계를 전제로 만들어졌지만, 관계를 설계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관계의 문제다. 서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지 않은 커뮤니티는, 결국 고립된 독백의 공간이 된다.





이 네 가지는 단순히 예쁘게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재정의하고, 감각을 조직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시각디자인은 그래서, 사용자의 문제를 디자이너의 언어로 번역해주는 직능이라 할 수 있다.


디자인은 왜 해결의 언어가 되어야 할까?


문제는 늘 형태가 아닌 관계 속에서 생긴다. 사용자가 제품을 잘못 사용하거나, 광고를 잘못 해석하거나, 브랜드의 가치를 오해할 때—그건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실패다.


디자인이 해결의 언어가 되려면,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문제를 정의하는 시각

- 문제를 ‘불편함’이나 ‘불만’이 아니라, 시스템의 어긋남으로 바라보는 태도

사용자를 해석하는 감각

- 대상이 아닌 관계자로서의 사용자를 상정하고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형태를 통해 메시지를 구조화하는 기술

-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설계하는 안목



이 세 가지가 통합될 때, 시각디자인은 감정을 조율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며 사용자의 경험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설계 도구가 된다.


시각디자인은 단지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왜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다. 문제가 없다면, 디자인도 필요 없다. 그러나 세상엔 늘 무언가 불편하고, 놓치고, 불완전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간극을 다루는 일이 바로 시각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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