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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지나간 자리에는 전설만 남았다

열차가 들려준 다섯 개의 마을 이야기

by 헬로 보이저
톰슨강


기차는 단순히 사람을 옮기지 않았다.
그건 세상의 기억을 실어 나르며,
지나온 시간의 체온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그 열차 안에서 **12개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길 위에서 살아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시스코 다리

프레지아 강 로키 마운틴 가는 기차길

1. 람보가 지나간 산길
기차가 협곡을 돌며 속도를 늦췄을 때,
승무원이 말했다.
“이곳이 람보 영화의 촬영지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관광 안내라기보다,
조용한 묵념에 가까웠다.

“전쟁이 끝나고도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삶을 다시 세우기 위해,
이 산 아래에서 철로를 놓던 사람들.”

그 말에 모두 창밖을 바라봤다.
이 협곡의 바람에는 아직도
어딘가에 남은 총성과 후회의 잔향이 섞여 있었다.

람보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이 남긴 **모든 외로움의 이름**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 역시 영화 속 장면보다 현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차의 진동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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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수리와 연어의 강
강 위로 하얀 독수리가 내려앉았다.
“저 강은 연어가 돌아오는 곳이에요.”
승무원의 말이 바람에 실렸다.

연어들은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길 끝엔 산란이, 그리고 마지막 숨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도 다 같은 생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쳐도, 다쳐도,
끝내 다시 삶을 향해 헤엄치는 존재들.



햇빛이 물살에 번질 때,
나는 깨달았다.
**돌아감이 곧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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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란 집의 여인
로키 마운티니어가 이 구간을 지날 때면
언제나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던 여인이 있었다.
커피잔을 들고, 기차를 향해 웃던 사람.
그녀는 ‘노란 집의 여인’이라 불렸다.

그러던 어느 해,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커튼만 바람에 흔들렸다.

며칠 뒤, 로키 마운티니어 직원들이 그 집을 찾아갔다.
문을 연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아내는… 떠났습니다.”

그 소식에 회사는 그녀의 가족을 열차에 초대했다.
그녀가 평생 바라보던 이 선로 위를,
마지막으로 함께 달릴 수 있도록.

그날의 장면은 캐나다 방송에 소개됐다.
승객들중 눈물을 훔친던 이도 있었다.


지금도 기차가 그 집 앞을 지날 때
창가엔 남편과 강아지가 서서 손을 흔든다.

우리도 같이 흔들었다.
그녀의 자리를 대신 지키듯이,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로키 마운티니어는 그 구간을 지날 때면
속도를 살짝 늦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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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핵 요양소의 잔향
기차가 숲을 가르고 언덕 위로 오를 때,
승무원이 말했다.
“저 산 위엔 예전 결핵 요양소가 있었어요.
4,0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죠.”

지금은 어린이 정신병원이 들어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누군가의 마지막 숨 위에서
다른 누군가의 첫울음이 자란다는 걸.


죽음이 사라진 자리에
삶이 피어나는 풍경이,
그토록 고요하고도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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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전쟁의 두 기차
기차가 마지막 협곡을 지나며,
승무원이 낮은 목소리로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1950년 11월,
이 근처 카누 리버에서 두 열차가 정면으로 충돌했어요.
한쪽은 한국전쟁에 파병되던 캐나다 병사들,
다른 한쪽은 군수물자를 싣고 오던 열차였죠.”

그 사고로 **21명이 사망했고**,
그중 **17명은 한국으로 향하던 젊은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 길 위에서 멈춰 섰다.

기차는 그 지역을 지날 때마다
방송도 없이, 잠시 속도를 늦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그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침묵의 예식**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손끝을 붙이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격례를 올렸다.

그 순간,
기차의 창에 비친 내 얼굴 위로
멀리 캐나다의 돌산이 스쳤다.
눈 덮인 능선이 한국의 겨울 산처럼 보였다.


나는 기도했다.
이 이야기를 우리 한국 사람들도
언젠가 알게 되기를.
그 젊은 병사들이 바라보던 하늘이
지금 우리의 평화로 이어지기를.

기차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나는 창밖으로 스쳐가는 숲과 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눈이 아닌, 빛나는 여름 잎들이
햇살에 흔들리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아는 것보다
세상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


지나온 모든 길마다
사람들이 머물다 간 이야기와 전설,
그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

나는 그것들을 더 많이 듣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그 길 위에 남아 있던 것은
풀잎의 떨림과 강줄기의 숨결,
그리고 —
**누군가 머물다 간 마음의 잔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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