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대한 그리움
도심 속 산 아래 위치한 주말농장 진입로에 들어서자 차 창가로 보이는 양쪽 둘레길에 소박한 하양 빛깔을 내는 들꽃들이 한복을 입고 고전 무용을 하듯 춤사위를 맘껏 뽐낸다. 아카시아꽃, 찔레꽃, 이팝꽃 하양 꽃들과 푸른 잎사귀는 이인 일조가 되어 도심 속 사람들을 순결한 미소로 유혹한다. 스마트폰에 지쳐있는 내 눈은 순백의 꽃들에 어느새 긴장감이 풀려 촉촉한 수분을 머금는다.
강렬한 붉은 피와 예리한 가시를 숨긴 찔레꽃이 뽀얀 작은 얼굴로 수줍은 듯 웃고 있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그의 꽃말은 고독, 신중한 사랑,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헤어진 가족을 찾다 쓰러진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찔레였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
찔레꽃과 향으로 가득한 깊은 산속에는 텃밭을 온종일 홀로 외롭게 지키는 깜둥이 순돌이가 살고 있다. 순돌이에게는 찔레와 비슷한 슬픈 사연이 있다. 주말농장을 운영하는 주인 집네 덩치 큰 개 순돌이는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생이별하게 되었다. 큰 개집이 더욱 허전해진 순돌이는 한 번도 짖어대지도 않고 슬픈 눈으로 농장에 가고 오는 사람들만 바라볼 뿐이다.
여름 같은 봄날 공원에서 친구와 시원한 분수를 보며 시원한 커피 한잔!. 서로 감성 신호가 통했다. 커피숍을 찾아 헤매던 내 눈은 뜬금없이 노점 채소에 사로잡혔다. 작년 이맘때쯤 텃밭에서 직접 수확해 먹은 상추가 떠오르며, 커피 감성도 잊은 채 추억 감성이 엉뚱한 상추 욕심을 강하게 끌어올렸다.
오늘 아침에 직접 농장에서 수확해 온 채소라는 아주머니의 채소 홍보전략은 명품백을 파는 백화점보다 자존감이 높아 보인다. 연두색 프릴 드레스 같은 상추와 탱탱하고 통통한 아기 팔뚝 같은 연두색 오이, 직접 쑤었다는 젤리보다 찰진 도토리묵, 종합비타민보다 영양 만점인 산지 방풍나물. 텃밭 표 채소가 노점 진열장에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아담한 체구의 아주머니에게 상추 가격을 물어보자 파릇하고 활짝 핀 싱싱한 상추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천 원이라 한다. 검정비닐에 제법 두둑하게 채워도 가격은 착하기 그지없다. 다른 채소도 종류대로 하나씩 추가하자 어느덧 양손이 무거워진다.
센스 있는 아주머니도 후한 주문에 장단 맞추어 후하게 천 원을 할인해 주려 한다. 노점의 신선한 채소는 나에게는 오늘의 득템였기에 제 가격을 아주 쿨~하게 드렸다. 한층 기분이 업이 된 아주머니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며 칭찬의 말도 덤으로 준다.
노점에서 일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고 하소연한다. 비싸다며 더 깎아 달라는 사람은 부지기수며 오이가 제맛이 안 난다며 집에 가져갔다가 다시 들고 와서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 한 꾸러미로 포장된 상추를 반절만 떼어 달라고 조르는 사람, 사소한 일로 사람에게 시달린다고 엄마에게 이르듯 재잘거린다.
작은 이익으로 소소한 실랑이를 하는 것이 서민의 순박한 모습이지만, 길거리 인연에게도 작은 배려심으로 좋은 인상을 줘야겠다고 혼자 생각해 본다. 돈을 더 쳐준 것도 아닌데 순수한 아주머니 덕에 졸지에 예의 있는 사람이 되어 우리는 서로 좋은 인상을 주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오후 5시가 되면 퇴근하는 사람이 많은 지하철역으로 이동한다. 주부들은 저녁 찬을 고민하는 얼굴로 채소를 빤히 들여다보며 발걸음을 아주머니에게로 향한다. 상추 한 묶음이나 오이 4개, 도토리묵이 인기가 제일 좋았다.
내 마음 같아서는 서너 가지를 한꺼번에 사도 마트보다 저렴하게 사고 아주머니도 하루 장사가 일찍 끝날 것 같은데, 사람들은 딱 한 가지씩만 산다. 성격 좋은 아주머니는 그래도 좋은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마냐는 질문에 싱글벙글 웃으며 친절하게 응대한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중년의 아저씨를 가리키며 시선을 집중하도록 한다. 오만 원을 내고 채소를 산 후 거스름돈으로 이만 원을 주자 다시 수고비라고 준 분이라며, 저만치 사라진 아저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순간 나도 달려가서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지나가면 그만인 사람에게 적지 않은 금액을 이유 없이 드린 행인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역장이 지나가자 아주머니는 이전 역장도 좋은 분이고, 현직 역장도 좋은 분이라며 칭찬한다. 옆에 왔다 갔다 하는 요구르트 아줌마는 여우 같다고 싫어하는 눈치다. 길거리의 오고 가는 사람들이 아주머니에게는 큰 조직의 직장 동료들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아주머니는 대한민국 산을 안 올라간 곳이 없다며 사진을 보여준다. 길거리를 지나가며 채소를 사는 평범한 주부와 다를 바 없다. 시와 수필도 좋아하여 채소를 담아둔 수레 안에서 작은 에세이 한 권을 꺼내며 틈틈이 읽는다고 한다.
하얀 옷을 입고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아주머니는 청초한 찔레꽃 같다. 봄에는 쌉쌀한 새순 나물로서, 여름에는 예쁜 꽃, 가을에는 붉은 열매를 결실하여 약용으로도 쓰이므로 버릴 것이 없는 찔레처럼 알수록 매력적인 아주머니다.
엄마가 4살에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본인과 나이가 같은 딸이 있는 새어머니를 집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새어머니에게 친딸과 차별을 받으며 외롭게 살아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노래를 너무 좋아하여 전주곡만 들어도 어떤 노래인지 알고 비와 눈도 좋아하는 감성 풍부한 소녀 같은 분이다. 새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음의 상처를 억누르고 당시 십만 원을 줬지만, 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못 들은 것이 한스럽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는 친정어머니를 마음에서 그리워하다 시와 노래 꽃이 피었다는 아주머니를 보며 누군가 가족을 그리워하다 쓰러진 자리에서 하얀 찔레꽃이 피었다는 꽃말이 떠오른다. 순백의 하얀 꽃일지라도 가시를 가진 찔레처럼 온화한 아주머니도 때론 막무가내인 행인들에게는 당차게 한다.
길거리 인연이지만 가끔 내가 생각난다며 된장국을 끓여 먹으라며 배춧잎을 챙겨주는 인심 좋은 분이다.
아주머니를 만난 이후, 올해도 산 기운을 받는 텃밭에서 상추 농사에 도전해 보았다.
상추 가지 오이 고추 등 모종을 심고 물을 줄 때는, 가족을 잃은 깜둥이 순돌이도 꼬리를 흔들며 옆에서 말없이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