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속에 피어난 꽃
봄바람이 감성을 간지럼 태우던 어느 봄날.
바람 따라 햇살 따라 책 한 권을 끼고 하천을 걸었다.
물길 따라 꽃길 따라 고고한 한 마리의 학과 유유자적 발을 맞춘다.
포롱포롱한 어린 들꽃들이 기다렸다는 듯 구애하듯 서로 손을 흔든다.
허공에서 넘실거리는 새소리는 도심의 소음을 머금고 나를 향해 봄 향기를 뿜어 댄다.
자연과 나는 물아일체가 되어 어느덧 숲 속 저만치 가 있었다.
타샤의 비밀 정원 안으로 들어간 듯 동화 속 카페가 나온다.
강한 햇살만 보면 눈이 부셔 알레르기성
재채기가 나온다.
이 봄도 햇살만 보면 재채기가 나오는 걸까.
목련 나무 한 그루가 꽃 필 준비를 한다.
뻥튀기 기계에서 ‘뻥’ 터지면 하늘 높이
치솟는 하얀 튀밥처럼,
봄 햇살의 큰 재채기 소리에 놀란 목련 나뭇가지에도 흰 쌀 튀밥이 튀겨져 가득하다.
결혼 후 첫 보금자리는 펜트하우스 같은
고급 아파트도 아니고 신축아파트도 아닌 오래된 아담한 아파트였다.
반은 목련 나무로 반은 이중 삼중으로 주차된 차로 어수선한 아파트였다.
헌 아파트지만 생애 첫 내 소유의 집을 둘러싼 목련꽃은 참 아름다웠다.
하얀 꽃이 만발하면 아파트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결혼도 늦고 목련꽃의 아름다움을 안 것도, 늦은 서른의 나이.
신혼의 마음이 꽃이었다.
한해 한해 목련꽃과 함께 아이들을 하나, 둘, 셋을 낳아 키워가며
언젠가부터 내 눈에는 점점 목련꽃이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꽃식물을 키우는 취미를 가진 남편을 볼 때마다
답답함과 서운함이 커져만 간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육아와 가사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
나와 아이들보다 사랑받는 꽃들을 질투하며 메마른 땅처럼
건조해진 마음은 촉촉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 진짜 꽃은
꽃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후 직장에서
점심을 먹고 오고 가는 길목에서
꽃을 본다.
길거리 커피숍에서 여유롭게 앉아 대화하는 여인들도 보인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그녀들에게 시기심을 느끼며
봄기운에 깨어난 개구리가 점프하듯
일터를 뛰쳐나오고 싶었다.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심정으로 다시
회사로 향할 때면
봄날 화사한 꽃이,
차라리 눈에 안 보이길 원했다.
직장인에게 꽃은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제복을 입은 시절이 있다.
힘든 과정을 겪고 로망이었던 제복을 입었지만,
옷을 좋아하는 나만의 개성을 구속하는 것 같았고,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은 더 힘들었다.
사명을 상징하는 제복은 내 마음의 무게를 무겁게 했다.
제복과 사명보다
봄이 되면 하늘거리는 꽃무늬 원피스와 발목이 보이는 샌들이 더 좋았다.
바람 따라 살랑이는 꽃잎 빛깔의 샤방샤방한 옷이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것이 마음의 꽃이었다.
‘나는’
결국 마음의 꽃을 택하였다.
조용했던 숲 속 안의 비밀 커피숍이 순식간에 봄의 손짓에 매료된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가 멀어도 형형색색 들꽃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진척 없는 발걸음에도 들꽃에게 이름을
물어가며 걷는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꽃
그대로
아름다움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