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불멸의 사랑
아기자기한 식물들로 제법 구색을 갖춘 우리 집 안방 베란다는 미니멈 정원이다. 한겨울 목전에 식물 욕이 불끈대어 요놈 저놈 사둔 것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한 가족이 되었다. 몇 개는 강추위를 못 이기고 말린 시래기처럼 볼품없이 축 늘어져 버려 안타깝지만, 자생력 없는 체질 탓으로 돌리니 속이 편하다. 다행히 대부분은 구사일생으로 방 탈출 게임에서 성공하듯 한겨울을 잘 넘겼다.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식물은 새 아파트에 입주할 때부터 베란다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극락조이다. 커피숍에서 야자수만 한 극락조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하여 가장 만만한 친구에게 졸라 선물로 받아 낸 것이다. 꽃이 피면 아름다운 새 극락조를 빼어 닮아 극락조라고 한다. 잎이 여느 관엽식물보다 커 공기정화 능력도 뛰어나다. 커피숍을 삼킬 듯 비범하게 자란 극락조의 쭉쭉 뻗은 큰 잎사귀들이 내 마음의 미세먼지까지 빨아들일 것 같았다.
새집증후군 때문인지 집안에 들이는 화분마다 기력을 잃어가며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요염함을 뽐내며 설렘으로 환영받은 극락조 역시 시들해져 세 개의 촉수 중 한 개만 멀쩡하고 두 개는 볼품없이 초라해졌다. 촉수 한 개는 죽어버리고, 또 하나의 촉수는 껌 묻은 머리 잘라내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민둥머리로 만들었다. 그나마 살아있던 키 큰 줄기 한 개도 꺾여 임시방편으로 젓가락과 테이프로 깁스하여 장애 식물이 되어버렸으니, 예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새집에 있는 독한 유해 물질을 흡수하느라 병이 든 듯하다. 우리 가족의 건강을 위해 희생한 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새집증후군에 시달리다 유일하게 살아남아있는 극락조가 대견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관심과 사랑을 받은 극락조는, 민둥머리도 제법 자라고 새순도 하나씩 올라오다 어느덧 접혔던 우산이 활짝 펴지듯 이제는 서로 간에 자리싸움하며 기량을 뽐내기 시작한다. 젓가락 깁스하고 있는 줄기는 아직 감히 테이프를 풀지 못하고 있다. 테이프가 호흡을 답답하게 하여 성장이 멈출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만에 하나 테이프를 푸는 순간 겨우 버티던 연명이 수포가 될까 두렵다. 어리석게도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한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자마자 우리 집 큰딸에게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왔다. 새집 유해 물질보다 더 고약한 사춘기 호르몬이다. 유해 물질이 온 가족을 집안에 감금하듯 사춘기 호르몬은 큰딸을 방안에 감금했다. 게임에 중독되어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아 살아있는 건지 가끔 궁금할 지경이다. 머리와 얼굴은 기름으로 쩐 프라이팬 같아서 보는 이마다 심란하게 만든다. 여드름 범벅인 얼굴이 걱정되어 세수 좀 하라고 하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태풍을 맞은 듯 아수라장이기에 심호흡을 먼저 해야 한다. 열정적이고 깔끔했던 딸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져 가끔 다른 집 딸이 와있나 싶다. 온 가족이 여행할 때도 혼자 놔두고 가라 한다.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더 답답했다. 소통을 거부하니 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싱싱하고 파릇했던 극락조가 새집에 들어와서 증후군을 앓아 병이 들 듯이 생기발랄했던 큰딸도 사춘기 바이러스로 친구들과 단절되어 심한 사춘기를 앓았다. 촉수 하나가 죽어버리고 또 하나가 시들해지듯 아이도 매일 실습하던 요리도 점점 지겨운지 멈추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도 점점 의욕을 잃어갔다. 젓가락 깁스를 한 줄기처럼 아이의 마음에는 말 못 할 상처가 있는지 철벽으로 꽁꽁 싸맸다. 병든 극락조처럼 아이의 영혼도 병든 것 같아 내 마음을 졸였다. 처음 봤던 극락조의 모습이 그립듯이 아이의 통통 뛰는 모습이 그리웠다. 대화 좀 시도하려면 방에서 나가라 하여 아이 앞에서 슬픈 사슴처럼 두 눈에 눈물을 머금으며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부모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들을 때면 크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잘 참아내야 했다. 지인이 사춘기 딸 머리를 홧김에 잡아당기니 머리가 한주먹 나왔다더니 참 이해가 간다.
주위 사람들은 청소년 전문 상담사에게 심리상담을 받아보라고 했지만, 사랑과 이해는 모든 것을 이길 힘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생생했던 극락조가 시들어간 이유가 있듯 큰딸에게도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엄마에게 당연히 불만이 있을 것 같았지만, 뚜껑을 열어 모든 걸 적나라하게 볼 자신이 없었다.
극락조를 다시 살릴 수 있었던 건 사랑과 관심이었다. 극락조의 시든 부분은 먼저 다듬어 깔끔하게 한 후 영양제로 허함을 채우고, 거실에서 베란다로 위치를 바꾸어 적당한 통풍과 햇빛으로 순환과 양기 충전도 해주었다. 식물 돌보는 것에 능숙하지 않아도 지성이면 감천이기에 점점 회복세로 전환되어 갔다.
첫 사춘기 딸을 키우며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의 지저분한 방도 청소해 주고, 게임에만 빠져 있는 딸 이빨에 칫솔을 물려주어 양치질도 도와줬다. 제 자리에 있어만 줘도 감사했던 극락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친구를 안 만나는 아이에게 또래 사촌이 있는 남동생 집에 자주 보내어 사촌과 이틀 정도 놀고 오면 정신 통풍이 되는지 눈빛이 한결 부드럽다. 아이패드를 사주고 넷플릭스를 가입해 주니, 영화에 몰두하여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었는지 웃는 모습이 햇살처럼 빛난다.
극락조와 큰아이는 비슷한 무렵 상처를 입은 후 엄마의 인내와 서툰 보살핌으로 진심을 느꼈는지 무기력이 사라지고 차차 에너지를 뿜뿜 품어 낸다.
젓가락을 의지한 채로 버젓이 큰 키를 자랑하는 줄기 한 개와 제법 풍성해진 잎사귀 가족들, 여기저기 움트는 새순들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즐겁다.
큰딸은 방학을 제대로 즐겼다. 게임, 영화, 요리, 여행, 메이크업을 하면서 구성지게 힐링했다. 더 크면 얼마나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야 하냐며 실컷 쉬도록 내 버려두었다. 새 학년이 되는 아이는 개학 무렵이 되자 새순이 돋아나는 극락조처럼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갑자기 한 번도 가지 않은 수학학원을 등록해 달라고 하고, 스스로 생활계획표를 짜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한다.
까칠한 사춘기 소녀에게는 교육보다는 사랑과 이해가 특효약인듯하다.
극락조와 딸을 바라보는 엄마 마음에 봄이 찾아왔다. 극락조와 딸에게 봄이 왔기에.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표현하는 극락조의 꽃말처럼
딸을 향한 엄마의 사랑도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