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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 - ' 꽃과 함께하는 삶 '

by 열음

여물지 않아 덜 익은 풋과일처럼

시고 떫어

어설펐던 국민학교 시절.


지각이 잦았던 나에게는

학교보다 매일 아침 ‘뽀뽀뽀’ 뽀미 언니를

만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꽃 머리띠를 한 뽀미 언니를 보기 위해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버텨보지만,

엄마의 불벼락에 어쩔 수 없이

좁다란 등판에 커다란 책가방을 둘러맨다.


작은 발걸음으로 4킬로를 걷는 일은

세상을 향한 첫 대여정이었다.

첫걸음은 무겁지만

끝없는 지평선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멈추어 버리고,

기묘한 하얀 토끼 따라

굴속으로 뛰어든 이상한 나라

앨리스가 된다.




쳐서고양이, 모자장수, 하트여왕을

만난 앨리스처럼

넓은 평야에서 신기한 모험들이 시작된다.

아직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뽀미 언니를 만나고

손끝으로 하늘 위 구름도 건드려보고

무지개 색깔을 띠고 있는 바람 위에서

미끄럼도 타고

땅속의 개미들을 도와 먹이를 날라준다.


예쁜 데이지 꽃잎에 앉아

꿀을 먹는 벌이 반가워 말을 걸자,

순간 “엥~”

작은 손가락이 빨갛게 부풀어 오른다.


꿈에서 깨어난 앨리스처럼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발걸음이 빨라진다.

신문지에 정성스레 싸준

엄마표 장미꽃다발로

작은 얼굴을 숨기고

묵직한 교실 문을

조심스레 연다.


선생님은 꽃향기를 마신 후

꽃다발 속에 묻힌 내 모습을 찾아내어

오늘은 혼내지 않겠다는

환한 웃음으로 화답한다.



우리 집 정원은 다양한 꽃들로 가득했다.

장미 넝쿨에 안긴 담벼락은

화려한 스카프를 두른 도도한 여인처럼

우리 집 자존심을 높인다.


박태기 나무, 은사철 나무, 장미, 홍도화,

수국, 바위치.

계절이 머무는 집이었다.

꽃에 물을 주는 일은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아빠가 기다란 호스를 잡고

하늘을 겨냥하면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무지개를 만든다.

우리 세 남매는 왈츠에 춤을 추듯

물줄기를 따라다니며

물놀이 동산의 세계에 들어간다.


어린 나의 눈에

돌담 사이 낀 초록 이끼들은

오래된 별자리였고

여러 갈래 통로와 방을 지닌

땅속의 개미집은

또 하나의 행성이었다.

꽃과 풀

햇빛과 그림자

바람과 먼지는

어린 나에게

빛나는 은하이며, 끝없는 우주였다.


가진 건

천진난만과 동심,

떠도는 흰 구름처럼 자유로웠던

그 시절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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