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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달맞이꽃 - '꿈을 가진 삶'

기다림, 인내, 희망

by 열음

저녁 하늘에 빛줄기가 하나씩 내려앉을 때

피어오르는 꽃이 있다.

‘밤의 요정’ 달맞이꽃.


꽃말은 기다림, 인내, 희망이다.

희망을 머금은 꽃봉오리가 기다림 속에

꽃잎을 펼친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부러움의 대상은

긴 머리를 한 무용 반 여학생들이었다.


절도있게 허리를 곧게 세우고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복도를 고고한 학처럼 우아하게 걷는

그녀들은 남녀 학생들의 로망이었다.


신데렐라처럼

무용 반 청소 담당이었던 나에게

그녀들의 한마디 말이 나를 설레게 했다.

“발레에 어울리는 몸과 발을 가졌어요.”


그날 이후

무용 시간은 가장 기다리던 수업 시간이

되었다.


숨겨진 빛을 품은 원석이

조금씩 반짝거리는 보석이 되어가듯

꿈을 가진 소녀로 변화되어 갔다.

말수가 적었던 나는

나의 마음을 몸짓으로 이야기하고

수줍음이 많던 나는

공간에 울려 퍼지는 리듬과 하나가 되어

마음껏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더 이상 누군가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꿈이 생겼고

자신을 믿어보는 큰 계기가 되었다.


남녀공학이었던 학교는 가을 축제의 날

행사를 위해

무용 잘하는 여학생 6명을 선발했다.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여유롭게 지명을 기다렸지만

내 예측은 부서지고

반전의 드라마가 전개되어 갔다.

뜻밖의 친구들로 6명이 구성되었고,

모호한 기준 속에서

혼란과 뒤엉킨 감정 속에서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가을밤 해 질 무렵

야자시간에 자율 학습을 뒤로하고

나만의 아지트를 찾았다.

학교 건물 뒤 테니스 코트장 언덕배기에는

나처럼 외로운 들꽃들이 서로 위로하며

먼저 달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풀밭에 앉아 홀로 눈물을 훔쳤다.

한참을 울고 나자

억울함은 짠 내로 삼켜내고

창피함은 바람의 흐느낌으로

날아갔다.


다음날

수업 종례 후 남아서 무용 연습하던

친구들을 위해

큰 칠판에 글을 남겼다.

“ 얘들아, 열심히 연습해서 좋은 공연

보여 줘~. 파이팅!!”

나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진심의 울림이었고, 진심은 나를 크게

위로해 주었다.

다행히 눈물은 이미 말라 뽀송뽀송해져

있었다.


가을 축제의 날

친구들은 예쁘게 화장한 얼굴과

화려한 의상으로

남녀 학생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그날의 주인공이 되었다.

착한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는


시샘을 삼켜내어 꽃으로

피워 내야 했다.


어느 날 무용 선생님은

어른이 된 이 순간에도 알 수 없는 나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무용을 가장 잘하고, 무대에 어울리는

얼굴이야.!”

안도와 의문이 교차했고,


아주 가끔 하나의 생각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처럼 스쳐 지나간다.

'교장 선생님 손녀인 그 친구와 인싸들

때문인 걸까...'



어두운 고요 속에서 희망이 열리면

생명의 파동이 울린다.

달빛 아래 빛나는 너의 꽃봉오리가

엄마에게는 그리움과 아쉬움이었고

남겨진 발자국이었다.


엄마의 못다 핀 꽃

너의 노래가 되었다.


중학생 딸이 경쟁률이 높은 치어리더가 되었다.

청소년 행사와 시 축제의 날이면 항상 무대에 오른다.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처럼

얼굴은 달맞이꽃처럼 환하고

몸짓은 출렁거리는 파도처럼

힘이 있으면서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유연했다.


엄마를 닮은 달맞이꽃.

어두운 밤이 되어야 마법을 부린다.

엄마에게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달빛 아래 딸의 발걸음 속에서

다시 피어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진다.

또 다른 누군가의 가슴에서 피어나기 위해.


노란 달맞이꽃

엄마의 꿈은 낮에는 꼭 다문 봉우리처럼

한켠에 숨겨져 있었지만 사라지지 않고

밤이 되면 고개를 드는 달맞이꽃처럼


딸에게서 찬란히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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