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밤장수 아저씨의 첫눈

by 열음


까만 겨울 하늘에 별과 달만이 한창 빛날 새벽 네 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와 브라질의 16강전이 열린다.
20년 전 한일 월드컵 못지않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열기가 고요한 겨울 새벽의 향기를 삼키는 듯하다.


중학생 딸은 새벽 두 시에 친구들과 시내 영화관으로 가 응원한 뒤 찜질방에서 자겠다며 한껏 들떠 있다.

딸의 월드컵 감수성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고,

결국 나도 흥분을 절제하지 못한 채 남편 몰래 허락하고 말았다.

딸은 응원하느라, 나는 누워서 딸 걱정하느라 눈을 뜬 채 각자의 밤을 새웠다. 동상이몽이었다.


한겨울 밤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듯 아침이 되자,

딸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기 결과에 밤샘이 아깝다며 허무함을 호소한다.

그러고는 찜질방으로 와서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며 떼를 쓴다.


새하얀 함박눈이 내리는 아침 등굣길은 순백의 양털 카펫을 걷는 듯해,

찌뿌둥한 회색빛 모녀의 심신을 조용히 위로해 준다.

풍성한 하얀 솜덩이들이 진줏빛 자동차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다시 신이 난다.


잠시 하얀 물감으로 덮어놓은 세상의 색이 벗겨질세라,

딸은 그 장면을 두 눈동자 안에 담아두고 기분 좋게 학교로 들어간다.



얼마 전, 친구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에 가기 위해 골목길을 지나던 중이었다.

우리 앞에는 불안하고 답답한 풍경이 펼쳐졌다.


승용차 한 대가 서행하며 길을 막고 있었고,

그 앞에는 군고구마와 군밤을 파는 손수레가 있었다.

군밤 아저씨는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태평하게 손수레를 끌고 가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차를 앞질러 손수레의 꽁무니를 밀어주었다.

턱에 걸려 있던 손수레가 쑥 올라가며 골목길의 병목은 순식간에 풀렸다.


아저씨는 누군가의 도움을 감으로 느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 종이컵 하나를 던지며 가던 길을 갔다.

그 종이컵 안에는 군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는 “이게 웬 떡이냐”며 커피와 군밤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간식을 즐기며,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밤 열 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

대낮처럼 알밤과 고구마를 굽고 있는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우리를 알아본 아저씨는 구면인 양 활짝 웃었고,

그 얼굴빛은 불 위에서 타오르는 군밤보다 더 뜨거워 보였다.

다음엔 꼭 차 한 잔 사주고 싶다던 말과 함께,

우리는 따끈한 간식과 훈훈한 마음을 나누며 헤어졌다.




다음 날, 근처를 지나다 장사 중인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반갑게 맞으며 전날의 일을 풀어놓았다.

손수레를 끌며 뒤에서 차가 오는 줄 알고 마음이 급했는데, 도로의 턱까지 겹쳐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데,

여자분들이 손수레를 밀어줘 위기를 넘겼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우리가 다시 찾아와 군고구마를 사는 사이,

뜸하던 손님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어 순식간에

7~8만 원어치를 팔았다고 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집에 갈 수 있었다는 말에,

사소한 친절이 누군가에겐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음을 실감했다.



예순 중반의 아저씨는 저렴하지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주며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60대 초반에 뇌경색을 앓아 왼손이 반마비가 되었고,

몇 년을 벌이 없이 지내며 아내에게 늘 죄인 같다고 했다.

젊은 시절 겪은 병의 원인은,

레커를 몰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스무 살 아들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군고구마 껍질을 벗기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목이 메었다.

위로의 말은 떠오르지 않고, 물 마시듯 커피만 벌컥벌컥 삼켰다.



월드컵 응원 원정에 나간 딸을 데리러 나갔다가 얼떨결에 첫눈을 맞은 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보내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저녁을 챙긴 뒤 친구와 차 한 잔을 하며 군밤 아저씨를 위문할 겸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나 우리의 깜짝 방문에 환히 웃을 줄 알았던 아저씨의 얼굴은,

까맣게 타버린 군고구마처럼 어두웠다.
전날 잠시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는 사이

노점 단속반이 나와 기계를 두고 간 것을 문제 삼아

2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는 것이다.

오늘 다시 나온 단속반에게 사정을 설명해 이번 부과는 면했지만,

다음에 또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기계를 끌고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다.


추위 때문인지 마비 때문인지 유난히 부어 있는 왼손이 눈에 들어왔다.

기계 옆에는 먹다 만 김밥 한 줄이 은박지에 싸여 있었다.


이제는 김밥 한 줄도 길거리에서 서서 먹어야 하는 삶이다.

오늘은 군밤과 군고구마가 빨리 팔려야 할 텐데, 괜히 마음이 쓰였다.

첫눈의 분위기를 즐기겠다고 밤중에 나온 내가 철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입 짧은 우리 가족에겐 많지만, 군밤 세 봉지와 군고구마 한 봉지를 사 들고 돌아왔다.




아파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보니,

신호등 제어함 위에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작은 눈오리가 보인다.

첫눈이 온 기념으로 장난 삼아 올려둔 것일 테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눈오리 하나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서 있다.

내일이면 녹아 흔적도 사라질 차디찬 눈오리가,
노점 단속에 기계를 빼앗길까 걱정하는 군밤장수 아저씨처럼 보였다.


* 2023년 <한국문학예술>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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