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대꾸하지 않았다

by 이채이


고독하고 그립고 아픈 시. 그 앞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던, 스무 살 적의 나를 기억한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부스럭거리며 밀려와, 깨지기를 반복하던 성산포의 파도를 회상한다. 잊고 있던 후미진 곳의 기억을 겨우겨우 퍼덕거리게 해 준, 이생진의 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기억한다.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던 여인의 버스를 타고, 제주의 마을을 돌아다녔다. 해녀들이 물질해 온 소라와 성게를 보았다. 성게의 가시만큼 촘촘하던 그물망과 그 그물망에 갇힌 여인들의 삶을 보았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았다. 바다의 짭조름한 맛이 들큰하게 씹히는 오후였다.

이곳에서는 소주가 삶이 되고, 눈물이 시가 되고, 돈이 밥이 되는 축복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신의 축복은 아름답고 특별한 성소에 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닷속 깊은 곳의 아픔을 쓸어 담아, 소라 한 접시로 내어놓는 여인의 마음에, 그저 있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빛이 없어도 태생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무풍의 바닷길을 품고 있다.

여인들은 돌담에 미역을 말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 곡조는 배워 익힌 흥이 아니라, 제 몸에서 저절로 소리가 되어 나오는 그런 것이었다. 여인들은 바다의 소리를 건져와서는 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귀에 익은 소리면서 처음 듣는 소리고, 누구나 부르지만 언제나 다른 소리다.

제주는 스쳐 지나가면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겠다. 술에 취한 섬을 베고 자려면, 파도가 흔들어도 그냥 자려면, 한 달은 살아야 한다고.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한 달은 살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여행객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객의 들뜸이나 낯선 풍경을 낭만으로 말하지 않고, 영탄을 쏟아내지 않는다. 그저 고달프고 고독한 한 사람이 주저앉아, 바다의 이야기를 들으며 쓴 시다. 술은 내가 마셔도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는 곳, 술주정이 없는 바다의 시다.

나는 시인의 길을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저 버스를 타고 아무 마을에나 내렸다. 어디를 가도 동백이 흐드러졌다. 바람은 동백의 빛만큼 진하고 쓰렸다. 동백은 바다를 위해, 바람을 위해 일제히 피어난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부르던 노래도 목이 쉬어 부를 수 없을 때, 그때 동백은 툭 하고 온몸을 던져 떨어진다. 길바닥엔 슬픔이 멍울져서 툭툭 널려있었다. 누군가 밟고 지나간 아픔, 갈려버린 외로움이 바닥에 통으로 깔려 있었다. 기어이 살아내고 싶은 사람들의 삶이 붉게 떨어졌다.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놀던 바다는 파도의 끝에 포말을 달고, 자꾸만 신호를 보낸다. 하늘이 쪼개지고 그 틈으로 쏟아지는 태초 빛이, 다정한 말의 무지개를 만든다. 무지개는 밤새 다독이고 달래고, 엄마 없는 아이를 돌본다. 바다는 밤새 자장가를 불렀다.

바다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동백은 빛을 토해내듯 또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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