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품은 풍경

by 이채이

그리움이란 감정이 천천히 퇴적되고 굳어진 화석 같다. 풍화되지 않고 깊이 감춰지는 것이 제 속성인가 보다. 무언가를 보고 들을 때, 맘에 새겨진 단어를 우연히 만날 때, 회상은 바람이 일듯 저절로 인다. 차오르는 마음으로 눈물이 머금어지는데, 흘렀다 고였다를 반복한다.

제 고향처럼 포근하게 기억되는 곳이 있다. 가을 아침, 물안개가 자욱한 날은 물을 따라 연막을 친 긴 강이 보고 싶고, 봄비 내리는 곡우에는 바위틈에 뿌리내린 차밭에 달려가고 싶다. 이것은 그윽한 기억이다.

마음에 품은 풍경은 마루 위에 모아 둔 겹겹의 이불 더미 같다. 뽀송하게 송송한 이불에는 성급하게 넘치는 햇살의 냄새가 나고, 색 바랜 꽃무늬의 아득함이 배어있다. 양지바른 산을 끼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안온하게 흐를 것이다. 산골마다 붉은 과실이 열리고 햇빛이 과육을 구워서, 산밭은 점점 달콤해진다. 산굽이를 따르는 바람을 맞고,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뒤집어쓸 때도 있을 것이다.

여름날 소나기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마을의 아이들은 무릎을 걷고 첨벙거린다. 얼굴로 빗방울을 맞으며 하늘의 물방울을 먹는다. 하늘의 비를 피하지 않고 두 팔을 벌려서 하늘에 닿게 한다. 그 손의 높이만큼 마음은 간절하다. 절대자의 음성을 듣고 춤추는 무녀처럼 접신으로 펄쩍이는 무동처럼, 그들은 비의 신성 속에서 환호한다.

소나기는 하늘 렌즈의 빛을 들여다보게 하고, 신의 돋보기 같은 무지개를 산마루에 걸어준다. 무지개는 인간의 가시 범위만큼만 얼굴을 내보여 그 이상을 볼 수 없다. 그것에는 가시성을 뛰어넘는 인식의 경계가 있기에 묘한 설렘과 해방감을 준다. 이는 하늘이 주는 땅의 선물로 여겨진다. 물과 빛이 만들어 낸 둥근 색의 고리를 쫓아가는 아이의 마음은, 음정과 박자를 제멋대로 연주하는 곡처럼 신난다.

고향의 소리는 두세 개의 단조로운 화음처럼 들려온다. 단출한 화음으로도 신비한 곡을 만드는 작곡가처럼, 부족해 보이는 음 안에서 편안함이 살아난다. 사계절이 더해지는 일은, 조바꿈을 반복해서 곡의 멜로디를 살리는 것과 같다. 산천에 스며있는 자연의 소리는 철을 따라 변주한다.

특히 계절이 바뀌는 순간은 격렬한 소리를 끌고 와서 무료함을 지운다. 봄이 오려할 때, 신은 미리 피어난 꽃들을 모조리 털어버릴 기세다. 밤새 가지를 통으로 흔드는 비바람. 이를 수긍하는 일은 보는 이를 숨 가쁘게 한다.

비가 가고 바람이 간다. 조급함과 애절함이 잦아들 즈음이면 서서히 진짜 봄이 걸어온다. 귀밑머리에 노란 민들레꽃을 달고 수줍게 온다.

멀리 술빵 냄새가 고여온다. 여름날 막걸리가 술통에서 쉬어 부글거리면 술빵을 만든다. 보글대는 막걸리를 부어 반죽해 두면, 저 스스로 발효하면서 몸을 부풀린다. 한나절 숨을 쉰 반죽에다 팥을 넣고 동그란 모양을 낸다.

너른 채반에 두고 쪄낸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야외 아궁이에서 술이 익어가는 향은 더 멀리 퍼진다. 구수하고 달큰한 술 내음이 사방으로 번지면 아이의 마음은 벌써 행복해진다. 한 집 걸러 한 집씩 술빵을 쪄내는 날은, '타는 저녁놀 속 술 익는 마을'에 당도한 나그네가 찾아올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도로변의 트럭에서 술빵을 판다. 좌판에 펼쳐진 큼직한 막걸리 빵은 멀리서도 냄새로 알 수 있다. 고향이란, 은은하게 퍼지는 막걸리 향이 배어나는 곳을 포함한다. 그 아득함은 부드럽게 기억을 어루만지며, 시간 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나에게 가고 싶은 마음의 둥지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끄덕일 것이다. 노곤한 햇살과 서늘한 강바람, 은은하게 스며드는 향기가 함께하는, 마음이 오래 머무는 그런 곳. 당신의 마음에도 그런 둥지가 있기를, 그 숨겨진 세상에서 천천히, 오래오래 호흡하기를.


keyword
이전 13화바다는 대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