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먼저 스며드는 그날의 온기
햇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그 길을,
오늘 드디어 걷는다.
설명하자면 어쩐지 복잡해진다.
그냥, 오래된 것들이 그리웠다.
바래진 돌계단, 낡은 대문, 그리고 그곳을 감싸는
공기의 냄새. 그 흔적들을 따라 걷다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맑아진다.
시선을 따라 걷는 그 길은 언제나처럼 설렘이
묻어 있었고, 그 안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작은
지혜들이 숨어 있었다.
한 빛결, 한 공기, 한 숨결마다, 침묵 속에 남아 있던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풀려갔다.
나는 고궁으로 향했다.
초여름 햇살이 단청에 닿자, 붉은 문양들이 천천히
퍼졌다. 정원의 공기는 그 빛이 스친 자리마다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그 결에 천천히 스며들듯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옛것의 숨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담고 있었다.
마지막 셔터를 누른 뒤,
나는 다음 장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여운이 마음속에 번지던 그때,
누군가 익숙한 목소리로 다가왔다.
"오빠, 진짜 너 맞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함께 문장을 나누던 이들이 오랜만의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 시절, 책은 우리 모임 속에서 침묵을 천천히
열어주는 열쇠였다.
와인을 디캔딩 하듯, 조심스럽던 대화는 이야기가
무르익을수록 더 맑고 따뜻하게 흘러나왔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익숙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오빠는 늘…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걸 그냥 지나치지
않더라. 그 순간들을 꼭, 기억처럼 담아두잖아."
그때도 그랬다.
그녀는 창가의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잔을 찍으려는 그녀의 눈빛까지 함께 담았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 장면은 빛과 감정이 참 잘 어우러져 있었다.
나는 단지, 그날의 공기와 눈빛이 좋아서 눌렀을 뿐인데,
그녀는 아직도 그 사진을 자기만의 공간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잊고 싶지 않은 마음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고.
"그날은 그냥, 그 사진 하나가 다 말해줬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 사진 속 표정처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순간은 그녀 마음 깊숙이 간직된 감정의 결이었다.
헤어지기 전,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다음엔… 예전처럼 우리 다시 모일까?
그때처럼 책 읽고, 이야기꽃 피우고."
그리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그걸로 다시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말은 나를 향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향한 하나의 조심스러운 제안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