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로 영상을 시청하던 시절. 좋아하는 프로그램도 매 순간 집중하기는 힘들었다. 때로 지루한 전개가 답답했고 때로는 보기 불편한 장면도 있었다. 그 순간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전원을 꺼버리던지, 불편함을 참고 끝까지 보던지.
유튜브 시대가 열리면서 새 선택지를 얻었다. 화면을 톡톡 건드리면 장면이 휙휙 넘어간다. 가벼운 손짓으로 전개가 빨라지고 보고 싶은 장면만 볼 수 있다. 톡톡, 빨리 감기. 톡톡, 또 빠르게 넘기기. 유튜브 세계는 지루함 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10월. 반소매 차림으로 출근할 정도로 날씨가 더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급격히 추워졌다. 하늘이 맑아 높푸른, 가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흩날리는 낙엽을 보며 감성에 젖는 일. 야외에 앉아 선선한 공기를 만끽하며 사색하는 일. 그런 무용하고 재미없는 일을 즐겨 보려 했건만, 사라진 가을 뒤꽁무니만 쳐다본다.
조물주 세계에도 기술 혁명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 극한의 더위와 추위에 맞서 발악하는 인간들의 모습. 그 얼마나 자극적이고도 흥미로운 장면인가. 행여나 도파민 수치가 떨어질까. 봄, 가을을 빨리 감기로 넘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서서히 만물이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봄.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천천히 진행되는 준비 과정. 지루해. 톡톡. 빨리 감기. 선선한 날씨에 평온하게 산책하며 책을 들기 시작하는 인간들. 자극 없이 무료한 장면이야. 톡톡. 빠르게 넘기기
봄, 가을이 빨리 넘어가는 바람에 세월도 빠르게 흐른다. 무더위를 겨우 물리치고 돌아서니 추워서 참을 수 없다. 과정도 사라진다. 서사는 혹독한 여름, 겨울만 있는 게 아닌데. 그 시련을 준비하기 위한 봄, 가을도 있는데.
빨라지고 있는 것인지. 빨라지게 된 것인지. 속절없이 흐르는 세계의 속도가 아쉬워 길에 멈추어 선다. 빠르게 자취를 감춘 해를 뒤로하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진다. 오늘 밤만이라도, 길고 충만해지기를 바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