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지우는 희생이 아니라, 더 넓은 '우리'로 확장되는 기적
식어버린 국과 엄마의 순서
저녁 식사 시간, 식탁 풍경은 늘 비슷하다. 나는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아이의 그릇에 먼저 퍼 담는다. 그다음은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국그릇을 채운다. 가장 맛있는 반찬, 살이 통통한 생선 한 토막은 아이의 숟가락 위에, 혹은 남편의 밥그릇 위에 얹어준다.
정작 내 밥그릇에는 밥솥 바닥을 긁은 누룽지 섞인 밥이 담기거나, 국이 식어 미지근해져 있을 때가 많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남편이 "당신은 식은 밥 먹어"라고 한 적도 없고, 아이가 "내 것만 챙겨줘"라고 떼를 쓴 적도 없다. 하지만 내 몸은 자동반사처럼 움직인다. 나보다 그들의 입에 따뜻한 밥이 들어가는 것을 볼 때, 이상하게도 내 배가 먼저 부르기 때문이다.
결혼 전, 나는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공이었다. 맛집에 가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골랐고, 백화점에 가면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라는 주어는 문장 뒤편으로 자꾸만 밀려났다.
오늘은 엄마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때로는 서글프지만 결국엔 눈부시게 빛나는 '우선순위의 재배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처음엔 억울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내 이름 석 자가 불리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디를 가도 나는 "누구 어머니", "누구 엄마"로 불렸다. 나의 취향, 나의 꿈, 나의 시간은 아이의 낮잠 시간과 등원 시간에 맞춰 조각조각 잘려 나갔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낯설었다. 늘어난 티셔츠, 질끈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유다람'이라는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저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인'이 된 것만 같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연애 시절 나만 바라보던 그 남자는, 이제 가장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밖에서 치열하게 싸우느라 집에 오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나는 그런 남편을 보살펴야 했다. 아이 챙기랴, 남편 챙기랴,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데 나는 끊임없이 타인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나는 언제 챙겨? 내 인생은 어디에 있어?"
샤워기 물소리에 묻혀 혼자 울던 밤들이 있었다.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공포. 그것은 엄마가 된 모든 여자가 겪는 첫 번째 성장통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그리고 남편과 함께 수많은 파도를 넘으면서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간이 단순한 '희생'이나 '소모'가 아님을.
아이가 아플 때 내 잠을 포기하고 밤새 간호하는 마음. 남편이 힘들어할 때 나의 투정을 삼키고 묵묵히 등을 다독여주는 마음. 그것은 내가 혼자 살았더라면 결코 배우지 못했을 '이타심(Altruism)'의 결정체였다.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 내 배고픔보다 아이의 포만감을 먼저 챙기는 것. 이것은 나를 지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그릇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결혼 전의 내가 1인분의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3인분, 4인분의 삶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품 넓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는 홀로 고고하게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와 부대끼고 사랑하고 책임을 다하는 관계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아이들만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살다 보면 남편 역시 때로는 큰 아들처럼, 때로는 짠한 동료처럼 내 손길을 필요로 한다.
신혼 초에는 남편 챙기는 게 억울했다. "다 큰 어른이 알아서 좀 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알겠다. 그도 밖에서는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가족을 위해 싫은 소리를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집이라는 둥지에서만큼은 그도 보살핌을 받고 싶은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내가 남편의 비타민을 챙기고, 그의 구겨진 셔츠를 다려주는 것은 그가 상전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우리 가정이라는 배를 함께 젓고 있는 유일한 '공동 선장'이기 때문이다. 선장이 지치지 않게 챙기는 것은 결국 우리 배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다.
남편을 챙기는 것은 결국 나를 챙기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건강해야 내가 덜 힘들고, 그가 행복해야 집안 공기가 따뜻해지니까. 우리는 서로를 먹이고 입히며, 그렇게 전우애를 다져가고 있었다.
가끔은 경력 단절이 두렵고, 도태되는 것 같아 불안할 때가 있다. 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작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가족을 위해 쏟은 내 시간과 노력은 결코 공중으로 흩어지는 먼지가 아니라는 것을.
그 시간들은 아이의 정서라는 옥토가 되어 단단하게 쌓이고 있다.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란 아이는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또한, 그 시간들은 남편의 어깨에 든든한 날개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간들은 '나'를 성장시켰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인내심을 배웠다. 말 안 통하는 아이를 설득하며 협상력을 배웠고, 아픈 아이를 지키며 강인함을 배웠다. 남편과 맞추어가며 포용력을 배웠다. 엄마라는 경력은 이력서 한 줄로 적을 수 없을지 몰라도, 내 인생이라는 책에서는 가장 빛나는 챕터다.
나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향으로, 더 깊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물이 되고 햇볕이 되어, 함께 자라는 숲이다.
이제 나는 밥상 앞에서 가장 맛있는 반찬을 아이에게 양보하며 서글퍼하지 않는다. 그 아이가 오물오물 먹는 입만 봐도 행복해지는, 예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다. 나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증거니까.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하다.
물론, 가끔은 지칠 것이다. 그때는 잠시 멈춰 서서 나에게도 따뜻한 밥 한 끼,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대접하면 된다.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나 자신을 아껴주는 법도, 나는 이 치열한 육아의 현장에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늦은 밤, 잠든 아이의 이불을 덮어주고 야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야식을 차린다. 내 시간은 또다시 뒤로 밀렸지만, 나는 안다. 이 소소하고 반복되는 돌봄의 시간들이 모여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나보다 그들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것은 내가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을 할 줄 아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자. 지금 내가 흘리는 땀방울은 우리 가족이라는 정원에 피어날 가장 아름다운 꽃의 거름이 되고 있으니. 우리는 매일매일, 헛되지 않은 위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 당신에게
"오늘 하루 뭐 했나 싶어."
아이를 키우다 보면, 집안일을 하다 보면 문득 이런 허무함이 찾아오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고, 치워도 티 안 나는 일들의 연속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아이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남편을 위해 끓인 찌개, 가족을 위해 참고 견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가정'이라는 따뜻한 울타리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멈춰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한 인간을 길러내고, 한 가정을 경영하는 가장 위대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잊은 것 같아 슬픈 날에는,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세요. 그 맑은 눈 속에 당신의 사랑이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이 쏟은 시간은 아이의 웃음이 되었고, 남편의 안식이 되었습니다.
서로를 통해 배우고 느끼며 자라는 이 시간,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크는 엄마, 유다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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