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와 AI

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16

by 사무관과 변호사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일하는 로펌의 고객은 대부분 기업이지만, 가끔은 개인 고객도 있다. 그런데 개인고객은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신기하게도 모두 AI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AI를 통해 자신의 질의를 정리하거나, 우리가 쓴 의견서나 서면을 AI로 검토한 다음 AI가 써준 검토의견을 다시 우리에게 물어본다거나 하는 식이다.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내가 쓴 서면을 법원에 제출하기 전 고객에게 확인차 보내자, 그 고객은 AI를 활용해 서면을 검토한 다음, AI가 제시한 의견을 반영해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확실히 AI가 보편화된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은 변호사와 AI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내가 처음 로펌에 들어왔을 때 우리 로펌은 신입 변호사 대상으로 OT를 진행했었다. 그 때 교육을 왔던 파트너 변호사 중 한 분은 말끝마다 "여러분은 AI에 너무 의지하면 안 된다, AI를 사용하면 티가 난다"고 말했다. 그 때 내가 했던 생각은 오히려, 현재 어쏘 변호사들이 AI를 많이 사용하고 있구나, AI 사용이 너무 퍼져서 이렇게 단속하는 말을 해야 하는 정도구나, 였다. 그래서 입사 초기에는 AI 활용법에 대한 책을 몇 권 읽기도 했었다. 로펌 업무량이 살인적이라는데 AI를 활용하면 조금이나마 업무량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어떨까? AI에 대한 나의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지, 실제로 업무하면서 나는 AI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나마도 챗지피티나 제미나이 같은 일반 AI는 한 달에 한 번 쓸까말까 한 수준이고, 리서치 용도로만 엘박스 AI를 사용한다. AI를 돌려본 결과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단 송무서면 작성에 있어서는 AI를 사용하지 못한다. 우선 변호사로서 비밀준수의무가 있기 때문에 자세한 사실관계를 AI에 입력할 수 없다. 만약 사실관계를 비틀고 단순하게 바꾼 다음 당사자들을 모두 익명으로 처리한다면 어떨까? 결과는 내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송무는 수백 수천 개에 이르는 증거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 서면에 그 증거들을 인용해가면서 상세하게 서면을 작성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관계를 단순화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송무의 성격에 맞지 않다. 앞서 말한 비밀준수의무 때문에 AI에 증거를 업로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물론 전세보증금 반환소송 같이 아주 단순한 소송은 AI로도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로펌에 오는 소송은 보통 그런 간단한 소송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딱 한 번 AI로 송무서면 작성을 시도해 본 다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


자문에서는 AI를 사용할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한 자문, 예를 들어 계약서 중 일부 조항에 대한 검토라거나 내용증명 초안의 문구 검토에서는 사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보통 대형로펌에서 처리하는 자문은 명확한 선례가 없는 사건에 대한 법령해석 및 대응방안 제시여서, 나는 AI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사실관계 및 관련 법령을 정리해서 AI에 묻는 것보다, 그 시간에 하급심 판결들을 뒤지고 소관 부처의 유권해석들을 찾아보는 게 훨씬 정확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문 업무에서도 AI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AI 활용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 고민한 적도 있다. 분명 OT 때 그 파트너 변호사는 어쏘 변호사들이 AI를 많이 쓰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 파트너 변호사가 속해있던 업무분야의 특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당 분야는 -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 단순 반복 작업이 주로 이루어지는 분야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계약서 조항 검토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업무에서는 AI가 확실히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솔직히, 단기간 내에 변호사가 AI로 대체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건의 사실관계를 어떠한 틀로 정리할지, 해당 사실관계에 어떠한 법령이 적용되어야 할지, 수많은 주장 중 무엇에 무게를 실을지, 이를 위해 어떤 증거를 제출하고 어떤 증거는 제출하지 않을지 등은 여전히 사람의 판단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위와 같은 판단을 대신 해줄만한 수준의 AI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AI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리서치나 단순 정리작업처럼 '판단'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에서는 이미 충분히 유용하고, 앞으로 더 발전할 여지도 많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AI는 변호사를 대체하기보다는 변호사의 일을 도와주는 도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쓰며 내 로펌 동기들에게 AI 활용에 대해 물어본 결과, 그들도 평소 나와 비슷하게 느낀 듯하다. 모두 제발 자신의 노동이 AI로 대체되면 좋겠다, 노동해방의 때는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이냐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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