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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을 결심했지만 아직 1년이 남았다 - 상편

2021년 상반기, 나는 퇴직을 준비했다.

by 사무관과 변호사

지난 글들에서는 내가 마치 단번에 퇴직을 결심하고 새로운 직업까지도 결정한 것마냥 묘사했지만, 사실 나는 생각을 굉장히 오랫동안 했었다.

퇴직 결심을 확고히 한 시점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던 그 국장님과 함께 일한 지 4~5개월 지난 였다. 그만큼 내가 가진 것들을 놓는 것이 아까우면서도 두려웠다. 일시적인 시련에 굴복한 건 아닐까, 하면서 나의 판단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서 내가 승진을 하더라도 이 구조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퇴직을 고민하느니 차라리 퇴직하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도록 준비를 철저히 한 다음 나가기로 했다.




내가 퇴직을 위해 제일 처음 했던 행동은 인사고충 신청이었다.


인사고충 신청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속해있던 기관의 인사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다른 공무원 조직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속해있던 기관은 기본적으로 실(室)-국(局)-과(課)-팀(team)으로 조직돼있었다. 인사이동은 A실에서 B실로 옮기는 것부터, C팀에서 D팀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인사고충 신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최소 국 단위였다. 따라서 만약 내 인사고충이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다른 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인사고충을 신청한다고 무조건 부서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기피업무를 하거나 일이 많은 부서는 사람이 남아나질 않을테니까. 따라서 못해도 그 부서에서 1년은 채워야 했다. 그러나 나는 6개월도 안 되어 인사고충을 신청했다.


국을 벗어날 거란 기대를 한 건 아니다. 내가 노린 효과는 두 가지 였다.


첫째, 국(局) 내 인사이동. 앞서 말했듯이 인사고충이 받아들여지면 국을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설령 인사고충이 기각되어 내가 속해 있던 국을 벗어나진 못하게 되더라도, 과(課)를 옮길 수는 있었다. 국 내부의 인사권은 국장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상 관심도 전문성도 없는 코딩 업무를 더 하고 싶지 않았고, 그 국장님과 대면하는 것도 고역이었기 때문에, 국장님에게 보고할 일이 없는 자리로 이동하고 싶었다. 다행히 국 내부에 내가 생각한 조건에 딱 맞는 팀장 자리가 있었다.


둘째, 국장님이 나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아 내가 생각한 팀장 자리로 인사이동하는 것이 실패하더라도, 국장에게 '나는 더 이상 업무에 대한 열의가 없다'는 의사를 전달. 그래서 나는 인사고충 신청서에 업무에 대한 열의를 모두 잃었고 우울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럼으로써 국장이 나에게 더 이상 업무를 지시하지 않길 바랐다.



결과는 내 예상대로였다. 인사고충은 기각되어 국에서 탈출하지는 못했지만, 국장님은 나를 국 내부에서 내가 점찍어놓은 팀장 자리로 이동시켰다. 아마 국장님은 나에게 불이익을 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마음 속으로는 그 자리를 원했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고. 그 자리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업무가 바쁘지도 않았으며, 행정직이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을 기획하는 일 없이 법에서 정한 업무를 매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른바 '야망이 넘치는 고시 출신 젊은 남자'가 가기에는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공무원으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버린 사람이었다.




그 자리에서 근무했던 6개월은 내 공무원 생활 5년 중 가장 평화로운 기간이었다. 일단 국장님께 보고할 일이 없으니 국장님의 폭언과 욕설을 들을 일도 없었다. 과장님, 팀원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었고, 업무도 여유로워 매일 칼퇴가 가능했다. 그 여유를 활용해 나는 공무원을 그만둔 후 어떤 일을 할지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다. 내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로스쿨 입시에 필요한 텝스와 법학적성시험 공부를 한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퇴직 전에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한 번 더 부서를 옮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현재 있는 자리는 내 만족도와는 별개로, 남들이 보기에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기관 내부에서도 그랬지만 기관 외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이유는 달랐지만).


내가 만약 변호사가 된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무원 경력이 나를 따라다니게 된다. 그런데 내 공무원 경력을 현재 자리로 마무리하게 된다면, 공무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다 퇴직한 사람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었다. 공무원 경력의 마지막만큼은 요직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6개월만에 기획조정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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