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느긋함이 아닌,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감에 대하여

by 석희

앤드류 그로브의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에 따르면 인텔은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시스템에 ‘여유(Slack)’를 둔다고 한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처음 들었을 땐 조금 기계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돌이켜보면 일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할 때, 또 삶을 살아갈 때

어떤 ‘여유’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그리고 그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여유를 낙천적인 성격이나 느긋한 태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여유는 그런 기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자산이다.


그 준비란 단순히 ‘계획을 잘 세운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경험을 해본 사람, 특히 실패를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있다.


“지금 이 일이 조금 틀어져도, 나는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이 믿음은 낙관이 아니라 경험에서 오는 통제감이다.

직접 부딪혀본 경험은 물론, 타인의 실패와 성공을 관찰하며 얻은 간접 경험도 포함된다.

예측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덜 조급해진다.

결국 여유는 흔들림이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나 역시 포함해서—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머릿속에서 ‘자체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이 일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얼마나 돈이 들고, 얼마나 벌 수 있을까?

내 사회적 위치나 평판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선택일까?


생각은 많아지고, 시뮬레이션이 길어질수록 발은 더디다.

어쩌면 지금은 부모가 그 시뮬레이션을 대신 돌려주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삶을 계획하고 결정해 볼 기회조차 없이,

누군가가 미리 짜둔 인생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니까.

(유치원부터 의대 준비반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놀라움을 넘어 씁쓸했다.)



물론, 시뮬레이션은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우리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 마음이 있다면, 어떤 미래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짜 ‘여유’의 시작 아닐까?



신뢰는 대단한 무언가로 증명되는 게 아니다.

일관성 있는 태도, 말과 행동의 작은 결이

계속해서 축적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뢰가 쌓이면, 사람들은 더 이상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 사람이니까.”


나는 그게 진짜 ‘내면의 준비’이자 ‘여유의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은 뭐든 ‘빨리’ 이뤄지길 바란다. 성과도, 사랑도, 성공도.

하지만 신뢰는 예외다.

이건 단거리 질주로는 만들 수 없는 유일한 감정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오래 걸리는 길이지만, 결국은 그게 가장 쉬운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




결국 중요한 건, 예측이 아닌 태도다.

흔들릴지언정 멈추지 않는 마음,

그게 진짜 여유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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