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의 시대, 기대치와 자존감에 관하여
“우리는 남들이 실제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행복해지기 어렵다.”
— 모건 하우절, 『불변의 법칙』
이 책이 참 좋았다. 특히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내가 늘 생각해 왔던 질문 하나를 다시 마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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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분명 과거보다 나아졌다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
1995년만 해도, 한국의 자동차 보급률은 100가구당 27대 수준에 불과했다.
무더운 여름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선풍기뿐이었고,
에어컨은 일부 가정에만 있는 ‘사치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고,
서울 시내 어디를 가도 수입차 한두 대쯤은 흔하게 눈에 띈다.
옷장은 더 넓어졌고, 그 안을 채우는 옷의 수는 두 배 이상 늘었다.
편의점 하나만 들어가도 세계 각국의 음식을 고를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식생활은 놀랍도록 다양해졌다.
더 좋은 집에서 자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더 다양한 선택지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점점 더 힘들다고 느낄까?
왜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마음은 더 지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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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는 왜 더 잔인해졌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비교 때문이다.
정확히는 타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중계’ 받는 시대 속에서
나의 현재를 왜곡되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SNS 속의 타인들은 늘 성공적이고, 늘 행복해 보인다.
그들의 삶은 “정답지”처럼 빛나고,
우리는 그들보다 뒤처졌다고 느낀다.
문제는, 그 감정이 실제의 고통이 아니라는 데 있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아프고,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는데도 계속 잃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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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색이 사라지고, 비교는 전면화되었다
예전에는 ‘지역색’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서울, 부산, 광주, 대전…
각 지역에는 각기 다른 유행이 있었고,
그 유행은 그 지역의 스타일을 선도하는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부산에는 부산만의 멋이 있었고,
광주에는 광주만의 감각이 있었다.
우리는 지역 안에서 보고, 따라 하고, 비교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TV 채널이 몇 개 없었고,
해외 유행은 외국에 다녀온 형이나 누나의 옷차림을 통해서야 겨우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좁았고,
비교의 범위도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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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이 유행을 만들고, 속도가 감정을 앞질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 세계가 동시에 같은 콘텐츠를 보고, 같은 기준을 공유한다.
브랜드, 스타일, 취향, 라이프스타일까지 —
이제 유행은 지역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결정한다.
누가 먼저 봤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빠르게 그것을 완성해 보여주는지가 중요해졌다.
비교는 공간을 초월했고, 속도는 감정을 앞질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예민해진다.
그 ‘누군가’는 더 이상 멀리 있는 타인이 아니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들, 혹은 매일 스크롤 속에 등장하는 팔로우하는 누군가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나는
괜히 뒤처진 사람, 패배자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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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많아도 벗어날 수 없는 심리의 덫
이건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좀 낫지 않나요?”
하지만 아니다.
재벌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 역시 자기만의 비교와 기준 안에 갇혀 있다.
수백억을 가졌어도, 그것보다 더 가진 사람을 보면 스스로를 작게 느낀다.
또는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기준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부도 자존감을 세워주지 못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예전부터 참 좋아하고, 나에게 큰 영향을 줬던 형이 한 명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이 형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남들보다 빨리 많은 것을 받아들였고,
술값, 선물, 여행까지…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이 형의 말을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
우리 모두, 어쩌면 그 형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그 형 차를 타고 우리 집에 가는 길이었다.
창밖을 보던 그 형이 문득 말했다.
“우리 아빠도 재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그가, 그토록 누리고 있는 그 삶을 살고 있는 그가 또 다른 결핍을 품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우리가 갈구하는 삶은 언제나 어딘가에 있다.
마치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 속 주인공처럼.
영화에서 길(오웬 윌슨 분)은 파리로 여행을 떠나 1920년대를 ‘황금시대(Golden Age)’로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이 되자, 마차가 그를 진짜 1920년대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피카소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또 다른 과거—‘벨 에포크(Belle Époque)’를 동경하고, 그곳 사람들은 다시 르네상스 시대를 그리워한다.
“Everyone thinks their era is the worst… but it’s just life.”
(모두가 자기 시대가 최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인생이야.)
길은 그제야 깨닫는다.
진짜 황금시대는 언제나 지금이 아니라 과거라고 믿는 착각이라는 것을. 그리고 결국 그는 현재로 돌아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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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은 나에게로, 비교의 방향을 바꾸는 일
그래서 나는 요즘, 비교의 방향을 바꾸려 한다.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와 비교하고, 갖지 못한 것보다 갖게 된 것에 집중하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세운 기대치가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타인을 의식한 것’인지를 자주 점검해 본다.
기대는 종종 성장의 촉진제이지만,
때론 나를 갉아먹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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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포장의 반대말이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자존감은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지금 내 삶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그 안에서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
무엇보다도 나를 포장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정직한 자세가 아닐까.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인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삶.
그게 자존감이고, 그 자존감이야말로 우리를 진짜 행복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