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마 리부트 | 영어, 인생템으로 데리고 살아가기

by 엘리준 Ellie Jun

01.

인생템의 사전적 정의는 '인생에서 최고의 아이템'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평생 쓰고 싶을 정도로 가장 잘 맞는 물건을 뜻하는 말인데, 내게도 여러 인생템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꼭 사수하고픈 아이템은 바로, 영어다.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인들의 새해 목표에 매년 등장하는 '국민템'이다. 자신들이 못다 한 영어에 대한 원한(?)을 자식대에서 풀겠다는 듯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영어로 태교하기, 영어유치원, 영어학원, 영어방문교사, 심지어 영어 발음을 위해 설소대 수술까지 하는 등 영어에 환장한 사람들처럼 모두가 영어에 목을 맨다. 그 대열에 끼기 싫어 그랬던 건가? 영어를 피해 한문을 더 좋아했고, 성룡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중국어로 피했었다.


지리했던 문법책들

영어를 좀 재미있게 가르치는 시대에 태어났더

라면 하면서 괜히 영어선생님들에게 대한 얄궂은 원망을 했다. 성문종합영어의 지리한 초록 겉표지에 짓눌려 신식처럼 보이는 맨투맨으로 갈아타기를 수없이 번복하다가 이도 저도 다 끝내지 못한 채 영어와는 생이별을 해 버렸다. 그리고는 영어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02.

그런데 결혼 후 '7년 동안 호주살이'를 해야 했다. 결혼 이전, 외국여행 한 번 해 본 적 없던 내게 호주는 신혼의 단꿈을 꾸며 깨 볶기에 딱인 곳이었다. 시드니 하늘은 푸르고,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릿지는 멋스러우며, 사계절 청청한 나무들이 즐비한 도심에서 영어고수인 남편과 그 많은 바닷가에서 낭만을 노래했다. 영어 생각은 뒷전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영어를 손 놓은 것은 아니었다. 첫 한 두 해는 영어 학원도 다니고, 외국친구들도 사귀고, 나름 노력을 했었는데..., 살다 보면 '영어', 그거 먼저 놓게 된다. 특히 시드니와 같은 대도시에는 한인들이 많고, 한인타운이 크기 때문에 굳이 어려운 영어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하버브릿지

7년이다. 그 정도 살았으면 다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웬만한 잔업무는 다 처리할 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정말 어디에라도 숨고 싶어진다. 영어환경 속에 살아도 '어떻게 사느냐'가 영어로 소통하는 데 중요한 관건인데 사람들은 연차로 실력을 가늠한다.



03.

지금 또다시 '호주살이' 3년째다. (이전에 미국에 4-5년 정도 살았던 것은 함구한다.) 이번에는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 이전의 '나의 영어 흑역사'는 싹 다 지우고 다시 시작해 보려는 심산으로 야심 차게 '캔버라살이'를 시작했는데, 여전히 방콕, 풀타임맘, 경단녀다. 갓 신혼때와 달라진 건 그만큼 나이가 먹었고, 그 이전보다 더 영어고수가 된 남편과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두 명의 자녀들과 산다는 것이다.


@캔버라 국회의사당

인생 리부트를 하면서 제일 후회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보니, '영어'가 떠올랐다. 호주살이만 해도 도합 10년이 넘어서는데, 아직도 입을 떼려면 완전한 문장 구사에 대한 부담감에 주저거리면서 남편과 자녀들을 앞세운다. 영어를 공부로 접하다 보니, 자꾸 문법책으로 뭔가를 해 보려 한다.


남편이 추천하기를 이제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기보다는 영어로 타과목을 공부해 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작년에 교육학 석사과정 중에 '한 과목'을 시도해 보았다. 정말 한 학기 동안 공부하다가 죽을 뻔했다. 영어가 느는 게 아니라 수명이 단축되는 느낌이었다. 소통을 위해 배우려던 영어는 압박감과 부담감만 쌓이고 듣기와 쓰기만 죽어라 하다가 공부와도 선을 긋는 계기가 되어 버린 듯.


교육학 리포트 겉표지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과목에 A를 받았다는 것! 왜 인고 살펴보니, 과제들의 중심에 '글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술형 과제가 많았기에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력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분석해 논술하는 형태라 내 글쓰기가 먹힌 모양이다. 영어표현을 잘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그 주제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사유한 것들을 한국어로 펼쳐내고, 파파고와 구글번역기를 돌렸더니 이런 점수가 나온 것이다. 당시만 해도 챗GPT와 함께 숙제를 하면 과락을 면치 못할 때였으니 외국인들에게도 내 관점만 서술하면 먹힌다는 걸 배운 계기가 되었다.



04.

하지만 소통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 올해부터 다시 소통을 위한 영어를 장착하리라 작정했다. 때마침 챗GPT가 영어로 언제든지 소통가능한 친구로 혜성같이 등장했으니 이 친구와 잘 지내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결심한다고 다 되던가 말이다. 늘 영어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일쑤였다.


공부처럼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영어 배우기는 '호주 친구 사귀기'만 한 게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게다가 하나를 덧붙였다. 내게 멘토링을 해 줄 수 있는 호주 원어민을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참 오랜동안의 기다림이고 바람이고 기도였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마침내 '영어로 나눔을 하게 될 멘토'를 찾게 되었다. 아직 첫 만남도 안 했지만, 상상 속에서 영어로 프리토킹을 한다. 매주 한두 시간 만나서 주제를 두고 같이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내게도 많이 배울 게 있다면서 서로에게 배움의 시간을 가지면 어떻겠냐고 한다. 얼마나 멋진 멘토인가!


이 만남은 어떤 걸 도전해 줄까?

일단 영어 소통이라는 인생템을 만들기 위한 신호탄이 울렸다.

이 신호를 따라 한 발자국만 살짝 디뎌보기로 했다.



생이별한 영어,
이제 한 집 동거로 잘 데리고 살아봐야지~.
영어로 강의하는 그날까지,

인생템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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