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의 자발적 기록의 역사는 중학교 2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격적인 시작은 핑크색 일기장이었다. 문방구에서 내 돈으로 처음 산, 번쩍이는 금색 자물쇠와 열쇠 가 달린 그 일기장, 누군가 볼 것 같아서 꼭꼭 잠가야 할 만큼 내 마음이 들키기 싫었던 시절이었다.
사춘기의 문을 막 열고 있었던 나는 넘쳐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글로 뱉어보고 싶다는, 지금 생각해도 기특한 결심을 했다. 그저 막연하게 마음이 울적한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마구 풀어내는 고통 호소장 같은 기록들을 적어나갔었다. 감성에 취해 혼자 써 내려간 밤들, 그 시간들이 나를 키우고 지금까지의 루틴들이 되었다.
02.
결혼을 앞두고 나는 다짐했다.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이전의 나, 그동안의 삶과는 단호히 작별하겠다고. 그 결심의 증표처럼, 오랫동안 써 온 일기장들을 한데 모았다. 사춘기의 혼란부터 스물일곱의 방황까지.
말로 꺼낼 수 없던 내 마음을 차곡차곡 눌어 담았던 수십 권의 기록들. 그것들을 나는 아파트 뒤편, 조용한 공터로 들고나갔다. 조심스레 불을 붙였다. 검은 재가 되어 날아가는 조각들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내 안의 무언가가 가볍게 비워지는 듯했다. 지금 와서야 그때 그 기록들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03.
그러고는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신혼의 단꿈의 기록 같은 일상을 적던 <그냥 일기>,
첫 아이를 가지고부터 아이와 내 몸의 반응과 감정적 반응을 살펴가며 적었던 <육아일기>,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발견하고 내 삶에 적용하려던 <묵상일기>,
매일 감사를 하면 나의 주파수가 부정적 에너지에서 긍정적으로 바뀐다 해서 <감사일기>,
기도제목도 수첩에다 써 가면서 추적하면 좋다 해서 <기도일기> 등 뭐든지 썼다.
닥치고 글쓰기를 했다.
27년 동안 나는 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냥 내 마음이, 내 삶이 써야 한다고 했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을 뿐이다.
04.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기록하는가?
자녀들에게 유산처럼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일까?
언젠가 책 한 권으로 엮이길 바라는 은근한 기대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오늘의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까? <줌마 리부트>라는 연재를 하면서, 단순히 글쓰기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쓰는지 알아야 오래 쓰고, 깊이 남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05.
기록은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
삶과 생활을 따라 글을 써내려다가 보면, 그 안에서 어느새 '나'가 보인다. 내가 느꼈던 감정과 내면이 발가벗겨진 듯 나타나 있다. 감정의 찌꺼기가 걸러지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 적혀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의 막연한 감정들이 글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다. 그때에야 그것들을 보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를 만나고 다시 보게 된다. 내 안의 나에게 분하고 억울하고 수치스러웠던 마음을 알아주고, 대면한다. 그리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어떤 감정은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고, 어떤 상처는 여전히 현재형인 것들도 있어 계속 주시하고 돌볼 필요도 본다.
그러므로 기록은 내 마음을 정돈하고, 그 속의 혼란을 천천히 필터링해 준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기록은 마음의 건강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06.
기록은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방향을 다시 맞추는 시간이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 물음 앞에 앉아 펜을 든다. 키보드와는 달리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도, 생각도 느려진다. 그 느린 호흡 속에서야 비로소 나는 진짜 내 꿈과 마주하게 된다.
다이어리 앞쪽에 <버킷 리스트>를 적고 해마다 업데이트한다.
매년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가 있다. 어떤 건 진작에 포기하고 지웠고, 어떤 건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적어두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종이에 쓴다는 건 세상을 향한 내 꿈의 한 줄을 새기는 일이다. 기록은 그렇게 나를 보다 정확한 삶의 궤도로 맞춰 나아가게 한다.
07.
기록은 일상의 포착이다.
기록은 특별한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파편들을 모으는 일이다. 하루 속에서 흘러가 버릴 뻔한 감사, 생각, 사건들을 붙잡아두는 일이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한 줄, 두 줄 적혀 나가다 보면, 어느새 한 권의 추억 앨범이 완성된다.
햇살이 눈부셨던 어느 봄날의 감사, 첫아이가 세상에 남긴 흔적이라며 테이프로 붙여둔 손톱 하나, 참으로 다른 두 자녀를 키우며 울고 울었던 고뇌에 찬 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맞이한 날의 몽롱함, 남편과 함께 했던 낯선 여행지에서의 색다른 경험들, 내 꿈과 비전을 위한 고민의 흔적들...
대수롭지 않게 써 내려간 기록들이, 웃음과 눈물, 꿈과 소망으로 범벅이 된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기록은 그런 것이다. 그때는 몰랐던 의미가, 나중엔 삶을 가득하게 메워주는 선물이 되었다.
08.
기록은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마주하게 한다.
오랜만에 꺼내든 27년 전의 일기장을 펼치면, 낯설면서도 익숙한 글씨들이 말을 건다. 그 시절의 내가 품었던 생각들, 씨름하던 고민들, 그리고 열정가득했던 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끔은 '이 나이에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다고?' 놀라며 미소 짓고, 또 어떤 날은 '그때도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구나'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이전에 적어두었던 아이디어 하나가, 지금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과거에 흔적이 현재에 파장을 일으키는 장면을 마주할 때, 나는 기록이 주는 감격을 새삼 실감한다.
줌마 리부트로 제 2의 인생을 열어가기로 마음먹고,
나는 더욱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수려한 글이 아니어도,
폼나는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심지어 지금은 그 의미가 뚜렷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삶을 제대로 살고자하는 나의 간절한 몸부림의 글쓰기,
그 하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와
함께 잇닿아 생각하고 대화하면서-.
기록은 내 인생의 리부트를 위한 도구이자,
세상을 향한 내 꿈의 한 줄을 새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