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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에 있어서 인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인이다.
동방 예의지국의 후예답게 예의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어른에 대한 공경과 예의가 심각할 정도로 무너졌다고 느낀다.
특히 어린아이일수록 예의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 아이의 인성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적절하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른의 행동을 고스란히 보고 자라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른, 바로 주 양육자의 행동과 가치관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주 작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 손을 거쳐 가는 몇몇의 학생일지라도 그들이 예의 바른 행동과 말을 한다면 조금은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그것이다.
물론 학교에서 동시에 많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훌륭하신 선생님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마음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나의 가치관이 한 번씩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건 바로 아이들의 귀여움이다.
4학년 소희는 솔직히 말해 예의가 없다.
소희는 평소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 아이다.
하지만 선생님과 친해졌다고 해서 반말을 하거나 버릇없이 말할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안녕." 혹은,
"싫은데." 혹은,
"응. 알겠어."
모두 나에게 하는 말투다.
"선생님이랑 아무리 친해도 그건 너무해. 선생님을 존중해 줄래?
선생님은 공부를 못해도 예의 바른 사람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다시 바르게 말하도록 지도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희는 어쩐지 미운 아이는 아니다.
화창한 어느 날, 하교 후 소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소희니?"
"응애, 응애."
뜬금없이 아기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그 목소리가 너무 귀여워 다시 귀를 기울인다.
“응애, 응애.”
얼떨결에 나도 따라서
"응애, 응애?"
하고 대답했다.
"응애, 응애, 3시?" (선생님, 조금 놀다가 3시에 가도 돼요?)
"응애, 응애." (그래.)
"응애! 응애!" (앗싸! 감사합니다!)
"응애, 응애." (그래, 이따 보자!)
"응애, 응애!" (네!)
아기 울음소리를 높낮이만 다르게 한 우리의 기괴한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전화기 너머에 있을 소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나 있었다.
아마도 선생님과의 대화 방식이 맘에 들었던 눈치다.
나는 '풉-'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이 아이는 예의를 모르는게 아니라, 그저 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구나.
소희는 여전히 똑 부러지고 예의도 잘 지키는 학생이다.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진 것을 안 후로는 나에게 반말을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내가 선생님한테 이렇게 해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네.
선생님이 나를 귀엽게 여기고 존중해 주는구나.'
소희는 그런 안정감과 즐거움을 느낀 듯했다.
아이들의 예의는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다.
존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아이는 스스로 바른길을 찾아간다.
비록 '응애, 응애'라는 장난스러운 대화일지라도
아이의 마음을 열고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을 여는 것은 형식적인 예절 교육보다도 어쩌면 더 효과적으로 다가온다.
언제나 딱딱한 지식만이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작은 순간들이 쌓여 아이들의 예의와 인성이 자라난다는 것을 나는 새삼 깨닫는다.
예의는 지식처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처럼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