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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끝의 거리만큼 부식된 관계

Through a Psychiatrist's Lens

Scene Triggered: 침대 끝에 남은 거리

Blue Valentine (2010)


그 장면의 공기는 흐릿한 빗방울처럼 천천히 고여 있었다.

침대 위, 한 사람은 모서리에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천천히 다가간다.

시트는 같았지만, 두 사람의 체온은 닿지 않는 거리를 만들었다.

그 사이의 공기는 덤덤하게 식어 있었고,

침묵의 무게는 서서히 공기를 질식시켰다.

서로의 시선은 같은 방에 머물렀지만,

한쪽은 어제의 기억을,

다른 한쪽은 내일의 부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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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n Snapshots

Y: 왜 이 장면에서 멈춰야 했니?

H: 저건 관계가 닳아가는 속도를 보여주거든.

그건 단번에 부서지는 게 아니야.

고장난 냉동실 얼음칸이 속부터 녹아내리듯, 겉은 한동안 그대로인 것 같지.

미세한 균열이 수없이 반복되다가, 마침내 전체가 허물어져.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관계의 안쪽이 소리 없이 부식되는 과정이야.



#Unspoken Frame

33273_84112_1811.jpg 병든 아이의 표정은 감정의 반복으로 마모된 표면처럼 느껴졌다.


H는 에드바르 뭉크의 〈병든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의 희미한 얼굴에 덧칠된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게 식어가는 사랑을 붙잡으려 했던 수많은 노력들이 쌓인 피로의 흔적이었다.

연결을 시도하지만, 이미 반은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관계라는 캔버스 위에서 겹칠을 반복하다 모든 색이 바래버린,

마모된 표면이었다.


#Conversation Snapshots

Y: 그 피로는 회복될 수 있어?

H: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반복된 노력 사이로 닳아버린 거라면...

다시 덮어쓸 수 없을지도 몰라.



#정신의학적 주석

이 장면에서 H는 정서적 부식(emotional corrosion)과 관계 피로(witness fatigue)를 목격한다.

정서적 부식: 장기간의 감정 소모와 반복된 갈등이 관계를 유지시키던

최소한의 긍정적 감정을 서서히 마모시키는 현상.

관계 피로: 지속적으로 상대의 고통이나 불만을 목격하며,

점차 감정적 반응이 둔화되는 상태.

이는 폭발적 결별보다 훨씬 조용하지만, 관계를 끝내는 가장 흔한 방식이다.

소리가 없고, 눈물도 없이,

그저 거리가 남아버린 침대 끝으로.



그리고 나는, 그 거리의 한쪽 끝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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