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인터라켄 33번 트레킹길, 이젤발트 (브리엔츠 호수)
26일간의 유럽여행 중 가장 좋았던 곳은 단연 스위스다. 깨끗한 공기와 물, 잘 갖춰진 관광 인프라, 법 없이도 살만큼 양심적인 사람들까지. 한마디로 숨통이 트이는 여행지였다.
왜 다들 스위스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지,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날씨는 구름이 약간 끼어있었지만, 오히려 운치를 더해주었다.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첫 일정은 33번 트레킹 길이었다. 검색해 보니 난도가 높지 않아 '슬리퍼를 신고도 완주했다'는 블로그 글이 있었다. 갈지 말지 잠시 고민했지만, 운동화를 신은 나에겐 충분히 가능한 코스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가보니 산을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려오는 코스이기에 초보자도 거뜬했다. 스위스의 융프라우와 알프스 산맥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니, 망설이지 말고 발걸음을 옮겨보길 권한다. 산에 관심이 없더라도 인터라켄의 33번 트레킹길은 꼭 걸어볼 만하다.
기차와 케이블카를 타고 '멘리헨'에 도착해서 '클라이네 샤이덱'까지 걸어 내려오는 완만한 코스다.
6월이라 작은 꽃들이 곳곳에 피어있었는데, 나에게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귀여운 꽃을 피워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도, 이런 꽃이 자주 피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스를 걸으며 계속 아름다운 풍경을 보다 보니, 나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분명, 우리 가족들 모두 좋아할 텐데... 이 좋은 곳에 함께 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이왕 온 거, 내가 가족들의 몫까지 즐겨서 그 행복을 안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채워진 행복을 다시 나눠주면 되는 거다.
한편, 이런 일도 있었다. 멘리헨으로 올라가는 열차 안에서 한국인 부부(혹은 커플)가 냉랭한 대화를 나누다 이내 서로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잠시 후, 한 사람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나는 옆옆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며 애써 모른 척, 한국인이 아닌 척을 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소중한 사람과 여행 와서 싸운다는 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만약 나였다면 같은 풍경도 덜 아름답게 보일까, 아니면 이 풍경을 즐기기 위해 어서 냉전을 풀고 싶을까. 각자 시간을 보낸 후에 다시 만나는 방법도 괜찮지만, 결국 최선은 화해하고 함께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나는 갈등 중인 상대가 없었기에, 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어떤 껄끄러움도 없이 만끽할 수 있었다.
곳곳에는 이렇게 하얀 눈이 얼어있었다. 이 사진을 보면 굉장히 추워 보이지만 사실 6월의 스위스는 늦가을 정도의 날씨였다. 반팔에 약간 도톰한 바람막이 하나 걸치면 딱 적당했기에, 얼음이 녹지 않는 게 신기했다.
트래킹 길을 걸으면 거대한 산의 굴곡, 끝을 알 수 없는 절경, 신비로운 색의 호수까지... 정말 다채로운 대자연을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작은 보폭으로 걷는 나는 참으로 미미한 존재였다.
그렇게 걷다 보니 내 복잡한 생각들도 모두 별 거 아닌 일로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들을 잊게 해 주었다. 자연이 내게 건네준 위로다.
산 중턱에 있는 호수의 색은 에메랄드보단 깊고, 청록보다 투명한 색이었다.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라 그런지 더 깨끗해 보였다.
클라이네 샤이덱까지 걸어서 무사히 도착한 후에는 다시 열차를 타고 내려갔다. 그 시간 동안에도 창문에는 멋진 풍경이 계속 펼쳐졌기에, 감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구름이 조금만 더 걷히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구름 덕에 산의 끝이 보이지 않아 신비감이 더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이젤발트'였다.
이젤발트는 브리엔츠 호수에 있는 포인트로,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유명한 장소라고 한다.
해가 지면서 호수에는 윤슬이 생겼다.
나는 물, 특히 투명한 물을 좋아하고 그 안에 햇빛이 스며든 물빛을 보면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 나에게 평온함을 안겨준 순간이었다.
호수에서 수영을 할 준비는 안 해가서, 그 대신 발을 담그는 걸로 만족했다. 물 온도는 얼음물같이 차가웠는데 딱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정도였다. 호수는 하루 종일 트래킹을 하고 걷느라 고생한 내 발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리고 호수에는 귀여운 오리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발을 담가서 브리엔츠 호수의 수질이 조금 나빠졌다면 죄책감이 든다. 오리의 삶의 터전을 더럽힌 셈이다. 그런데 호수에 온몸을 담가 수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발 정도는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물을 보며 멍을 때리면 시간이 참 잘 간다.
산 뒤로 넘어가는 태양을 보며 숙소로 돌아갔다.
스위스에서의 하루는 너무나 소중했다. 대자연이 전해주는 행복과 위로를 경험했기에, 모든 순간들을 곱씹게 된다. 마음이 답답할 때는, 나를 작게 만들고 세상을 크게 보여주는 자연 속으로 걸어가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