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냉정과 열정사이> 속 그곳에서
피렌체에는 가기 힘들었던 만큼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다. 바로 463개의 계단 위에 있는 두오모 쿠폴라다.
사실 전에는 두오모에 대해 잘 몰랐다. 올라가려는 사람이 많아 미리 예약해야 된다는 말만 듣고, 오후 3시 45분 표를 예매해 두었다. 두오모에 대한 관심은 여행을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커졌다.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남는 시간에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봤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 영화를 추천해 주시며 "그걸 보면 두오모가 가고 싶어 진다."라고 말씀하셨더랬다. 정말 그 말대로,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얼른 두오모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오모에 가는 그날이 왔다. 하지만 막상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났다. 계단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무려 463개라니 절망적이었다. 그날은 너무 더워서 순간 포기하고 싶었지만, 영화에 나온 그 장소를 직접 보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결제한 브루넬레스키 패스, 30유로(약 48,000원)가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왕 올라갈 거, 그전에 점심이라도 든든히 먹어두었다. 'Giotto Pizzeria Firenze'라는 식당에서 마르게리따 피자를 먹고, 후식으로는 티라미수를 먹었다. 피자도 맛있었지만 티라미수는 내가 유럽여행을 하면서 먹었던 모든 디저트 중 단연 1등이다.
배를 채우고 나서 시간에 맞춰서 줄을 섰다. 더운 날씨라 양산을 써도 뜨거운 햇빛에 온몸이 달아올랐고, 목 뒤에서 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이러다 일사병에 걸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입장을 할 수 있었다. 들어가니 건물 내부가 생각보다 더 시원해서, 정말 살 것 같았다.
올라가는 길에 성당 내부도 짧게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뒷사람이 줄 서서 바짝 따라오니 멈추기도 어려웠다. 여유 공간이 있을 때마다 잠시 쉬어가서 버틸 수 있었다. 다만 앞으로 계단이 몇 개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가장 답답했다.
그래도 올라가는 길에 돔의 내부를 빙 둘러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걸으며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정교하고 웅장해서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됐다.
계속 가다 보니 중간에 작은 창문이 있어서 밖을 내다봤는데, 거의 다 올라온 것 같아 의지가 살아났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계단은 가파르고 좁아져서, 난간을 잡으며 후들후들한 다리를 지탱했다. 그리고 마침내 환한 햇빛이 쏟아지며 도착을 알렸다. 힘들었지만 정상에 서니 고생은 순식간에 잊혔다.
위에서는 피렌체의 전경이 360도로 보였다. 지붕이 모두 적갈색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그런지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졌다. 조토의 종탑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고, 옆의 동그란 지붕인 메디치 예배당이 내려다보였다.
거기에 서 있으니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준세이와 아오이는 서로 사귀던 20살에 10년 뒤, 연인들의 성지인 피렌체 두오모에 가기로 한다. 두 사람은 오해로 헤어졌지만, 서로를 잊지 못하고 약속한 날에 쿠폴라(돔)에서 만난다. 그 장면이 너무 로맨틱해서, 나도 언젠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잠시 상상했다.
그런데 실제로 두오모를 올라보니, 몰입이 조금은 깨졌다. 영화를 찍으려고 스태프들이 장비를 든 채 463개의 계단을 올라갔다고 생각하니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주인공들은 구두를 신고 있었고, 돔에 도착해서도 뽀송하고 정돈된 상태를 유지했다. 그 많은 계단을 오르고도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 있단 말인가. 미스터리다.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머리칼이 흐트러지던 내 모습이 떠올라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 정도는 영화적 허용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두오모는 영화에서 먼저 본 후에 방문해서 그런지, 원래 알던 곳 같아 반가웠다. 그리고 힘들게 오른 끝에 맛본 정상의 기쁨이 더해져서 애정이 간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가서 노을을 볼 때도 두오모를 더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돔에서 감동적으로 재회할 연인은 없다.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가 생겼다. 맛있는 피자와 티라미수를 먹은 후, 더운 날씨에도 꿋꿋이 계단을 올라 정상을 정복했다는 그런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든다.
내 발걸음이 쌓여 피렌체에서의 추억이 완성되었다. 그 여운은 영화보다 오래 내 안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