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베리 3
늘 씩씩하던 아내도
친정엄마 생각만 하면 눈물바람이던 울보였다.
그런데 장모님이 오시니
얼굴에 생기가 돈다.
말도 많아지고
괜히 자꾸 노래도 흥얼거린다.
오십을 눈앞에 두고도
엄마 앞에선 아이가 되는 게
만고의 진리인가 보다.
나는 대용량만 취급하는 마트에 가서
설탕 10kg짜리 두 포대를 사 왔다.
설탕만 봐도 우리 집 식구들의 철학이 보인다.
뭐든 큼직큼직, 넉넉해야 맛도 난다는 것.
손 큰 아내가 사 오는 식재료 대부분이 덕용포장이다.
아내는 먼지랄 것도 없는 블랙베리를
한 알 한 알 고이고이 털어내며 씻었다.
소쿠리에 물기가 빠지기를 기다린 다음,
한 바가지씩 통에 담는다.
그러면 장모님은
계량컵 따위는 무시하고
툭툭 설탕을 손으로 퍼 넣으신다.
“엄마, 그냥 감으로 넣으면 돼~
엄마 손맛이 최고지.”
아내 말에 씨익 웃으시며
장모님은 또 설탕을 넣으신다.
나는 긴 고무장갑을 끼고
치대고, 뿌시고, 누르기를 반복했다.
켜켜이 쌓을수록
코끝에서 달큰한 복분자 향이 올라왔다.
슬쩍 장모님 눈치를 보니
“김서방, 손 좋네~” 하시며
엄지를 살짝 들어주신다.
한 통이 완성되자
아내가
“러닝셔츠 삶아 말려놨어.”
하며 하얀 천을 꺼낸다.
한 번도 입지 않은 내 러닝셔츠다.
그래도 뭐, 좋다.
술맛만 좋다면, 그까짓 것쯤이야.
장모님은 그 천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고무줄로 돌돌 감아 단단히 묶으신다.
“이제 지하 서늘한 데 보관하면 되네.”
술 담그는 내내
장모님과 아내와 나는
눈빛만 봐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장모님이 웃으시니
아내도 따라 웃고
나도 덩달아 웃게 된다.
그날 하루
복분자 향 속에서
나는 아내의 천진한 얼굴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장모님 돌아가실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헤아리다 보니
벌써부터 서운함이 밀려온다.
떠나시는 날,
또 울먹일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니
코끝이 찡해졌다.
“서너 달 지나면 잘 익을 게야.
체에 잘 걸러서 보관하고,
몸에 좋다 하니 아끼지 말고
부지런히 마시게.”
우리 집 지하,
순식간에 술도가로 변한 그곳엔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내가 함께 담근
복분자 술이 향긋하게 익어가고 있다.
나는 벌써
스테이크 한 점에 복분자 한 잔 곁들이며
알딸딸 기분 좋은
저녁 만찬을 상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