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풍경 7

블랙베리 3

by 도린

늘 씩씩하던 아내도

친정엄마 생각만 하면 눈물바람이던 울보였다.

그런데 장모님이 오시니

얼굴에 생기가 돈다.

말도 많아지고

괜히 자꾸 노래도 흥얼거린다.

오십을 눈앞에 두고도

엄마 앞에선 아이가 되는 게

만고의 진리인가 보다.


나는 대용량만 취급하는 마트에 가서

설탕 10kg짜리 두 포대를 사 왔다.

설탕만 봐도 우리 집 식구들의 철학이 보인다.

뭐든 큼직큼직, 넉넉해야 맛도 난다는 것.

손 큰 아내가 사 오는 식재료 대부분이 덕용포장이다.


아내는 먼지랄 것도 없는 블랙베리를

한 알 한 알 고이고이 털어내며 씻었다.

소쿠리에 물기가 빠지기를 기다린 다음,

한 바가지씩 통에 담는다.

그러면 장모님은

계량컵 따위는 무시하고

툭툭 설탕을 손으로 퍼 넣으신다.

“엄마, 그냥 감으로 넣으면 돼~

엄마 손맛이 최고지.”

아내 말에 씨익 웃으시며

장모님은 또 설탕을 넣으신다.


나는 긴 고무장갑을 끼고

치대고, 뿌시고, 누르기를 반복했다.

켜켜이 쌓을수록

코끝에서 달큰한 복분자 향이 올라왔다.

슬쩍 장모님 눈치를 보니

“김서방, 손 좋네~” 하시며

엄지를 살짝 들어주신다.


한 통이 완성되자

아내가

“러닝셔츠 삶아 말려놨어.”

하며 하얀 천을 꺼낸다.

한 번도 입지 않은 내 러닝셔츠다.

그래도 뭐, 좋다.

술맛만 좋다면, 그까짓 것쯤이야.


장모님은 그 천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고무줄로 돌돌 감아 단단히 묶으신다.

“이제 지하 서늘한 데 보관하면 되네.”


술 담그는 내내

장모님과 아내와 나는

눈빛만 봐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장모님이 웃으시니

아내도 따라 웃고

나도 덩달아 웃게 된다.


그날 하루

복분자 향 속에서

나는 아내의 천진한 얼굴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장모님 돌아가실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헤아리다 보니

벌써부터 서운함이 밀려온다.

떠나시는 날,

또 울먹일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니

코끝이 찡해졌다.


“서너 달 지나면 잘 익을 게야.

체에 잘 걸러서 보관하고,

몸에 좋다 하니 아끼지 말고

부지런히 마시게.”


우리 집 지하,

순식간에 술도가로 변한 그곳엔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내가 함께 담근

복분자 술이 향긋하게 익어가고 있다.


나는 벌써

스테이크 한 점에 복분자 한 잔 곁들이며

알딸딸 기분 좋은

저녁 만찬을 상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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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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