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풍경 8

블랙베리 4

by 도린

서너 달,

긴 시간이었지.

누구냐고?

나, 블랙베리… 복분자다.


7월 막바지,

온 힘 다해 까맣게 익어가던 내게

태평양 건너 먼 한국에서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셨어.


그리고 날,

막내딸 집으로 데려가셨지.


내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깨끗이 씻겨준 뒤

달큼한 설탕을 듬뿍 안겨 주더니

두 손으로 정성껏 치대어

커다란 통에 담아 지하로 데려갔어.


어두운 그곳에서

숨죽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적당한 알코올로 무르익어가면서


꼬부랑 할머니는 한국으로 가셨고

집주인내외는 요즘 무척 바쁜가 봐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다 되었는데

감감무소식이더,


지하로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

드디어, 드디어 나를 찾아오는 소리


큰 다라이, 작은 다라이

총출동하고

구멍 숭숭 뚫린 체들도

줄줄이 대동하고 지하로 내려왔어.


“장모님 생각나네.”

“엄마가 정성껏 따셨잖아.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알뜰하게 잘 걸러야지."

부부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어


큰 다라이에 고운 체를 얹고

나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따라내고

걸러내고를 반복했어.


나는 짙고 고운 자줏빛으로

그 손길에 응답해 주었지.

맑고 진하게 우러난 내 마음에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어.


“와… 이 맛 좀 봐.

진하네, 깊어.”

장모님 덕에 몸에 좋은 복분자 실컷 마시겠다."


조심조심 예쁜 병에 담기며

나는 어느새 빛이 되는 기분이었어.

달빛처럼 고요하게,

햇살처럼 따뜻하게.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 식탁,

웃음꽃 피는 친구들과의 모임.

잔을 기울일 때마다,

그들의 작은 행복이 될 나의 모습에

가슴은 콩닥콩닥,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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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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