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vs 짐
둘째가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남편의 임지를 따라 청도로 이사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 이층 사택이 있었는데, 아래층엔 교회를 관리하시는 사찰 집사님 가족이, 2층엔 우리 가족이 살았었다.
봄이면 복사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이면 씨 없는 단감이 연한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복숭아와 반시로 유명한 동네. 대구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하고 험난한'팔조령'이라는 고개 덕분에 6.25 전쟁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교회 앞엔 오일장이 서고, 뒤편으론 철길이 있어 기차 경적소리와 함께 사람 분주함으로 늘 시끌벅적했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요일이 되면 사찰 집사님이 둘째를 포대기에 업고 교회로 가셨고, 나는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첫째를 안고 예배에 참석했다. 한시라도 떨어뜨릴 수 없는 아이를 안고, 업고, 늘 몸에 껌딱지처럼 붙여 다녀야 했기에 몸은 언제나 피로했고, 늘 잠이 부족하던 때였다. 설교 시간이면 밀려드는 졸음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하지만 명색이 목사 사모가 예배 시간에 조는 건 남편 체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을 부릅떴다.
억지로 말똥 한 눈을 뜨고 버텨낸 ‘거룩한’ 예배가 끝나면, 주로 연세 지긋하신 교인들이 친교실에 모여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차린 점심상에 둘러앉았다.
복숭아, 반시만이 아니라 추어탕으로도 유명한 청도! 미꾸라지와 잡어를 삶아 곱게 갈고, 우거지와 대파를 듬뿍 넣어 끓인 추어탕에 갓 버무린 겉절이, 오징어채 무침까지 곁들이면, 그야말로 힘이 불끈 솟는 보양식이 따로 없었다.
그날도 예배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교회 식구들이 따뜻한 친교실 방바닥에 둘러앉았다.
축 늘어져 잠든 첫째를 무릎에 눕히고, 손 닿는데 까지 수저를 챙기며 국그릇과 밥그릇을 날랐다. 특별히 이날은 뜨근한 추어탕과 함께 들기름에 구운 김 한 접시가 상에 올라와 있었는데, 고소한 향이 입안에 군침을 돌게 했다.
식사 기도를 마치고 구운김에 하얀 쌀밥을 싸서 막 입에 넣으려는 찰나,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여, 김봉달이 있으요?”
인심 좋게 생긴 권사님 한분이
급하게 사람을 찾는 듯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대답 없이 추어탕 삼매경에 한창이었다, 나는 가만히 잠든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고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입에 살짝 같다 대고 교양 넘치는 목소리로 식사 중인 교인들을 향해 외쳤다.
“김봉달 씨~ 김봉달 씨~~ 권사님이 찾으시는데, 안 계신가요?”
순간, 식사를 하던 교인들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스쳤고, 권사님은 뭔가를, 누군가를 안타까워하는듯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닫고 떠나 버리셨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찬양 연습을 마치고 늦게 식사하는 성가대 대원들을 위해, 들기름에 구운 김을 따로 봉지에 싸 두었는데, 그 '김봉지'를 찾으러 오신 것이었다.
젊디 젊은 목사 사모가 아픈 아이 돌보느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정신이 나갔겠냐는 식의 염려 섞인 동정 여론이 있었다는 웃픈 이야기를 사찰 집사님이 둘째를 안겨주시며 전해주셨다.
아니, 그때 그냥 ‘짐봉달이’라고 했으면
찰떡같이 알아들었을 것을.
김봉지 라고 하시던지, 짐봉달이라고 해야지,
김은 표준어를 쓰시고, 다음에 봉지는 사투리로 봉달이라 했으니
새로 온 교인 중 한 사람의 이름으로 착각했던 것이 아닌가! ㅎㅎ
사투리와 표준어 사이를 넘나들다 생긴,
지금도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배꼽 잡고 웃게 되는 추억 한 토막이다.
그래도 그때 우리 둘째를 품에 안아 돌봐주시던 사찰집사님을 비롯해,
속 타던 내 마음 알아주던 교회 식구들이 매일같이 애달파하며 기도해 준 덕분에―
타고난 성격이 밝고,
몸뚱이 구석구석에 장착된 개그 본능으로
유머가 뼈에 새겨 있고
위트가 혈관을 타고 흐르던 젊은 새댁은
넘치던 끼가 다 눌린 채 인내하며 살아야 했던
그 힘든 시절에도 웃음을 놓지 않았더랬다.
목사 사모랍시고 조신한 척도 해 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