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형
나에게는 은밀한 취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가방에 매달린 인형을 구경하는 것이다. 출퇴근길에 지하철 안에서 혹은 출근길에 회사로 걸어가면서 사람들의 가방에 매달린 인형을 구경하고는 한다. 가방 중에서도 백팩에 인형을 매달은 사람들을 보면,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 백팩의 가방 앞면에 인형을 매다는 것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의 가방에 매달린 인형들을 구경하다보면, 하늘 아래 똑같은 인형은 거의 없으며, 혹시라도 똑같은 인형을 달고 다니는 사람을 두 명이상 만나는 일도 드문 일이라서 오늘은 출퇴근길에 사람들이 어떤 인형을 매달고 있나 구경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다.
학생들 중에는 백팩의 그물망이나 투명한 주머니에 인형을 한가득 담아다니는 학생들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 마음속으로 '월척이다.'라고 생각한다. 가방 앞면을 채운 수많은 인형들 중에서 의미없는 인형은 아무것도 없고, 소중한 인형들만 가득 담은 것일 것이기에 그 인형들을 구경하면서 각각의 인형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상상해보는 것이 즐겁다.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인형이라면 단순히 좋아한다는 순수한 감정만을 담고있을 것이기에 그 인형에 어떤 애정이 담겨있을지 상상하면 나를 끌어내리는 부정적인 감정이 옅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 은밀한 취미는 돈이 들지도 않고 조금만 주변에 시선을 돌리면 쉽게 사람들의 가방에 매달린 인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의 늪에 빠졌을 때 재빠르고 손쉽게 그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감정의 전환장치가 되어준다. 예상치 못한 귀여운 인형을 보면 머릿속의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저게 무슨 인형일까 하는 호기심이 올라온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홍대쪽에서 약속이 잡히면 그 쪽으로 이동하는 길마저도 즐거워지는데, 지하철에서부터 사람들의 가방에서 수많은 인형들을 만날 수 있다. 이 동네에 가면 인형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인형들은 각각 생김새도 다르고 알록달록해서 이 동네에 가면 인형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다른 사람의 가방에 매달린 인형을 보고 저게 뭘까 하면서 호기심을 갖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이상한 취미일 수도 있어서 '은밀한'이라는 단어를 붙이는데, 사실 이 취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의 가방으로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꾹 참고 인형을 발견했다는 반가운 마음을 누르며 겉으로는 태연하게 인형을 못본척 하는 것이다. 눈길이 계속 가지만 너무 대놓고 바라볼 수는 없으니 아주 슬쩍 훔쳐보고는 한다.
언젠가 한번은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가뜩이나 큰 헤드폰에 주먹만한 인형을 양옆으로 두개씩 매달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헤드폰에 헤드폰 만한 인형을 두개씩 달아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그쪽으로 가는데, 대놓고 쳐다보면 실례인 것 같아서 정말 최선을 다해 못본척 하면서 힐끔힐끔 인형을 훔쳐봤었다. 헤드폰에 커다란 인형을 매단 것을 보는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어서 머릿속의 고민이 한방에 날아갔다. 인형을 매단 사람도, 매달린 인형도 너무 귀여워서 귀여운 것을 보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인형을 가방에 매다는 것은 그 인형을 혼자만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함께 보자고 하는 의미인 것 같아서 인형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인형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에게서는 그 인형에 담긴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에, 인형을 매달고 가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된다. 가끔은 귀여운 인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가 가방에 귀여운 인형 하나를 매달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된다. 본인이 직접 고른 인형을 매달았다고 해도 미소 짓게 되지만, 어쩌면 손주에게 선물받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면, 그 인형은 평소 그 분이 받고 있는 사랑의 증거인 것 같아서 마음이 따스해진다. 아무 감정없이 그냥 인형을 가방에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꼭 가방이 아니더라도 인형을 보면 반가울 때가 있는데, 시내버스를 탈 때 버스카드를 찍는 기계 근처에 귀여운 인형이 달려 있는 걸 보면, 승객들에게 인형을 보여주려는 기사님의 다정함이 느껴진다.
가방에 매달려있는 인형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나도 인형을 가방에 매달고 다닐까 생각해 본적이 있는데,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아무 인형이나 매달고 다니기는 싫고, 가방에 매단다면 좋아하는 캐릭터의 인형을 매달고 싶은데, 좋아하는 캐릭터 인형을 백팩에 달고 다니면 그 인형이 더러워지거나 잃어버릴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하는 인형이라면 가방에 매달기보다는 방 한 켠에 두고 바라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정성껏 키운 화분에 예쁜 꽃이 피었을 때, 그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겠다며 집 앞에 화분을 내놓기도 한다는데, 나는 결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소중한 꽃이 피어있는 화분을 집 앞에 두면 누가 꽃을 통째로 뽑아가거나 꽃을 꺾어버릴까봐 불안하기 때문에 아끼는 것을 혼자 조용히 간직하고 싶다. 내 것은 소중히 집에 두면서 다른 사람의 가방에 달린 인형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모순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끼는 인형에 대한 내 마음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사실은 마흔살의 나이에 인형을 매달고 다니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하는데, 가방에 인형을 매달면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내가 매달고 싶은 인형은 ‘캐치! 티니핑’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활발하고 자신감 넘치는 소망의 티니핑이다. 이 티니핑은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당차고 생기발랄한 말괄량이 캐릭터다. 타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므로 티니핑 인형을 가방에 매달아봤자, '어머, 티니핑이네.' 하는 정도의 관심을 주겠지만, 사실 그 관심을 받게 되면 '사실 얘는 넘치는 자기애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며 마법의 별 머리핀을 부메랑처럼 던지거나 방패처럼 사용하는 능력이 있어. 게다가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다른 이들에게도 말하는 자기애 전도사인 티니핑이야.'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방에 인형을 매달고 다니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아끼는 것을 혼자 조용히 간직하고 싶다. 인형이든, 감정이든, 취향같은 것들을 드러내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다. 마흔살인 내가 캐치티니핑 중 어떤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것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이 나잇값을 못한다고 생각할까봐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그 인형으로 드러난 취향과 감정이 너무 선명해서 누군가 그 인형을 알아봐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보다는, 그걸 통해 내 취향이 들킬까 봐 결국 속으로만 간직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방 한켠에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두고 혼자 그 인형을 보면서 행복해하지만, 언젠가는 소중히 하는 인형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역시 또 좋아하는 인형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용기는 없어서, 그냥 그대로 방 한켠에 모셔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