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발레
요즘 미취학아동들이 사교육을 받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난 어릴 때 해보지도 못했던 레고블록조립을 조립하러 레고 학원에 가고, 나는 줄넘기를 못하는데, 줄넘기 과외를 받으며 깽깽이같은 줄넘기 기술들을 연습하는 것을 보면 또 부럽다. 영어를 못하는데, 영어유치원에 다니며 원어민 선생님한테 노래도 배우고 영어로 그림일기 쓰는 것이 부럽다. 나도 다니고 싶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한 열망이 커서 부모 돈으로 레고학원, 창의미술, 보드게임학원, 연극놀이학원, 방송댄스학원, 리듬체조학원, 놀이치료, 요리교실, 트램폴린학원, 클라이밍학원, 코딩학원, 영어유치원을 동시에 다니는 미취학아동들의 삶이 사실 부럽다. 하지만 나에게도 월급과 자유의지가 있다. 그래서 도전한 것이 발레였다. 마침 발레학원이 집 앞에 있었다.
발레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문화적 사치의 정점에 있었다. 직장인으로써 출퇴근에 필요한 기초체력을 기르기 위한 헬스도 아니고,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요가도 아니고, 성공하려면 필요하다는 골프도 아닌데, 그냥 단순히 한번 해보고 싶기 때문에 한다는 측면에서 발레만큼 사치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마흔살이 되도록 발레 가까이에도 가보지 못했는데, 한번쯤은 발레가 해보고 싶었다. 나는 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세상의 아주 일부만을 경험해왔으니까, 소득이 끊기면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울테니까, 발레를 배운다고 해서 이걸 어디에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돈을 벌고 있을 때 한번 해보고 싶었다. 뭘 배울 때마다 들어간 비용을 계산하고, 배운 것을 반드시 돈 버는 일에 사용해서 투자한 돈을 몇배로 뽑아먹어야만 뭘 배울 수 있는 정당성이 생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발레는 그냥 한번 배워보고 싶었다.
발레학원을 다니면서 놀랐던 것은 생각보다 수강생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수업마다 10명 이상씩은 함께 수업을 들었다. 발레 연습용 슈즈를 사기 위해 굳이 발레샵들이 몰려있는 압구정로데오역까지 갔었는데, 여러 발레샵에 가서 발레복도 구경할 겸 발레 연습용 슈즈를 직접 신어보고 사고 싶었다. 발레샵에는 발레를 전공하는 학생부터 무용수, 발레선생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생각보다 손님이 너무 많았다. 손님들은 발레를 오래 한 것이 분명해보였는데, 손님들의 자세부터가 꼿꼿하게 남달랐고, 모두 발레 머리를 하고 있었다. 발레샵 안은 50kg 이하 체중인 요정들의 모임같았다. 혹독한 자기관리의 아름다운 결과만이 남아 겉으로 보기에는 가늘고 하늘하늘해보이지만, 코어 근육만큼은 강철일것이 분명한 발레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물렁물렁하고 우람한 내 덩치가 민망했다. 발레세계에서 내 옷 사이즈는 XL 그 이상이었는데, XL 사이즈의 발레복을 만들어놓은 국내 발레복 업체에 감사했다. 내 사이즈의 발레복은 국내 업체밖에 없었다.
나는 발레학원의 성인 레벨0반을 다녔고, 발레수업은 매트운동과 바 동작으로 진행되었다. 발레수업이 시작하면 요가매트를 깔아놓고 스트레칭과 코어 집중 단련을 하는데, 이 단계는 너무 힘든 단계였다. 몸에서 코어근육이 가장 물렁한 나로서는 코어를 일깨워 발레동작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이 매트운동 부분이 가장 어려웠는데, 매트운동만 해도 땀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누워서 다리를 모은 후 다리를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는 레그레이즈를 할 때면 하늘이 노래졌다. 레그레이즈를 한 스무번 하고 나면 매트운동이 마지막에 다다른 것인데, 레그레이즈가 끝나면 매트 운동이 마무리되고, 매트를 정리한 후에 바를 플로어 위로 가져와서 바 동작이 시작된다. 드디어 발레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보기에도 발레같은 동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발레수업을 들으면 눈과 귀가 즐거운데, 발레 수업은 발레복을 입고 수업을 한다. 처음에는 우람한 덩치에 발레복을 입기가 민망해서 편한 옷을 입었지만 나중에는 제대로 발레복을 갖춰 입고 했다. 수강생들의 발레복은 제각각 디자인도 다르고 화려해서 다른 사람의 발레복을 관찰하는 재미도 컸다. 발레복을 갖추고 수업을 들으면 확실히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그리고 클래식이나 클래식 스타일로 편곡된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해야 하는데, 음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 좋았다. 클래식 음악에 맞춰 레그레이즈를 했던 것도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절대 입지 않는 여성스러움이 가득 드러나는 발레복을 입고 우아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발레동작을 하다보면 나에게도 이런 고상함이 있었나 싶은 자아도취에 빠지고는 했다.
발레복이나 음악도 생소했지만, 가장 생소한 것은 도무지 의도에 맞게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었다. 그 동안 여러 운동에 도전하면서 운동신경이 없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 뚝딱거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발레는 해본 것 중에 가장 못했다. 내 몸의 근육을 전혀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왼발 딛어야 할 때 오른발 딛고, 오른발 딛어야 할 때 왼발을 딛고는 했다. 머리와 어깨, 팔, 다리, 발목 등 어느 하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없었는데, 처음부터 발레를 잘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발레학원을 다니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수업 내내 뚝딱거리다 와도 그저 즐거웠다.
뭔가를 할 때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그나마 잘하는 편에 속해야 마음이 편하고, 내가 제일 못하는 사람이 되면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아 그 시간을 싫어하고는 했다. 잘 하는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질이 있어서 매번 힘들어했다. 못 하는 것을 할 때 스트레스가 큰 편인데, 발레는 처음부터 내가 잘 할 수 없는 분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발레만큼은 내가 그 수업시간에 가장 못하는 사람이어도 발레수업을 듣는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기로 했다.
매트운동이 끝나고 하는 바 동작에서는 1번에서 8번까지의 팔 포지션, 1번에서 5번까지의 발 포지션 등을 연습하고 플리에, 그랑 바뜨망같은 엄청 있어보이는 프랑스어 단어로 된 동작도 한다. 플리에는 접다, 구부리다 라는 프랑스어 동사인데, 선생님이 플리에 하면 뭔가 교양있어보이지만 사실 접어요 하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알려주셔서 재밌게 받아들였다. 그랑 바뜨망이라는 동작은 다리를 크고 높게 차올리는 동작인데, 이 동작은 사실 발끝이 머리위까지 올라가야 하는 동작이지만, 코어가 말랑말랑한 나는 무릎 높이 정도까지만 간신히 다리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겨우 이 정도로 하면서도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땀을 많이 흘리고 나면, 어떤 성취감과 뿌듯함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그래서 발레 수업이 끝나면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에 두번, 한시간씩 세달을 발레수업을 들었었는데, 세달 내내 발포지션, 팔포지션, 기본 동작들을 연습했었다. 그런데 기본 동작을 하더라도 매 수업시간마다 매번 틀리고 어려워서 선생님으로부터 '누구님! 그렇게 하지 말랬잖아요!' 라고 지적도 많이 받았었는데, 혼나면서도 재밌었다. 내가 봐도 발레동작을 진짜 못했는데, 한번도 수업에 빠진적은 없다. 한번도 결석한 적 없이 수업은 열심히 참석했기 때문에 발레 동작을 못해도 조금은 당당할 수 있었다.
마지막 발레 수업에서는 선생님이 3개월 동안 한 몸처럼 꼭 붙잡고 있던 바를 놓고 기본 동작을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바에서 손을 떼려니 중심을 잡기도 어려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여러분, 바를 놓으세요! 놓으시라구요!'라고 하는 선생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바를 놓으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면서 결국 바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평소에 사람 눈을 못쳐다보는 편이고, 뭘 배울 때 선생님이 시키는 것은 억지로라도 하는 편인데, 그때 만큼은 바를 꼭 쥔 채 선생님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발레를 할 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머릿속의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는 그 고양된 감각이 좋았다. 발레를 계속 한다면, 지금도 못하는 고난이도의 동작은 역시 어렵겠지만, 40대가 되어서도, 50대가 되어서도 발레를 계속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짜 못하는데도, 발레를 하는 내가 좋았다. 하지만 회사가 바빠지고, 새로운 인생의 과제가 주어지면서 발레학원을 그만 다니기로 결정했다. 아쉬웠지만, 현실의 숙제 앞에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월수입과도 관련이 없는 발레는 사치스럽게 느껴졌고, 인생의 과제 앞에서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발레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발레를 그만 다니기로 했다.
시간이 흐른 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작품 중 하나인 '호두까기인형'을 보러 갔었다. 작품을 보는데,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뻔했다. 호두까기인형의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뻔한 것은 아니었고, 겨우 발레 3개월 취미로 배워봤다고 그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세계가 한꺼번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레 공연이 처음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발레를 배우고 나서 발레공연을 보니 딱 취미발레 3개월치 만큼 세상이 넓어져 있었다.
발레를 배우기 전, 발레리나들을 그저 예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지금은 극한의 절제와 훈련으로 자기 수양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고, 무대에 오르는 모든 무용수가 토슈즈를 신는 줄 알았는데, 토슈즈는 여성 솔리스트와 군무 여성 무용수만 신는 다는 것도 보였다. 수업시간에 배웠던 1번부터 5번까지 발 포지션과 1번부터 8번까지 팔 포지션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작을 할 때 발끝이 한번을 톡 치는지, 두번을 톡톡 치는지도 구분되었다. 3개월 동안 발레동작 하나 제대로 마스터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발레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눈이 생겨서 무대 위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이전과는 다르게 발레공연이 재밌게 느껴졌다. 그래서 공연을 보는데 뭉클했다. 겨우 3개월 취미 발레를 배웠다고, 공연을 보는 눈이 이렇게 풍성해지다니. 세상이 이렇게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이라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