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예술적 삶은 지속 가능한가

by 채송화

예술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하늘 아래 첫 동네. 엄마는 고향을 꼭 그렇게 불렀다.

나는 설화와 민담이 현실과 뒤섞인 배경에서 자랐다. 자면서 들었던 엄마의 옛날 얘기에 상상력은 정점을 찍어 가며 불어났다. 우리 식구들이 강원도 산골에 살다가 도시로 이사 나온 지 반백년이 넘었다. 그런데 입맛은 여전히 강원도식이다. 처음에 엄마는 사람들이 냉이를 캐 먹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고향 산천에서 먹던 나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발자국 있는데만 난다는 귀한 '유리대'. 나물 노래에도 나오는 곤드레, 딱주기. 꺾세 꺾세 고사리 꺾세. 고비. 고사리. 참나물과 취나물. 버섯 사촌 지간인 '글쿠'와 송이.


심지어 나는 세 살 때 나왔기 때문에 태어난 집 기억도 없다. 하지만 내 입맛도 역시 강원도 입맛이다.

강원도 '갓짐치' 만두라든지, 감자를 갈고 배추를 척척 깔고 부친 '감재적'이라든지. 메밀전병이라든지.

'호랑이가 지고 왔다는 안반'에, 엄마가 홍두깨로 밀어 만든 가쉬기(칼국수). 더 쫄깃하게 해서 여름에 비빔으로 먹는 '꾀미국수'. 나물을 말렸다가 겨울에 묵나물된장국으로 먹는 다던지.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도 삼 년까지는 엄마가 담근 된장과 고추장을 먹었다.


남편이 치매가 아닐 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강원도에 갔다. 그이들은 예술, 철학, 문학하는 서울 사람들이었다. 점심으로 두부를 곁들인 산나물 정식을 먹었다. 그 사람들은 먹는 내내 감탄했다. 다 먹고 택배를 신청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로서는 저게 저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왜냐면 엄마 아버지 친척들은 여전히 강원도에 살았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먹는 건 외갓집이나 친척집에서 가져오기도 하고 부쳐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상이란 그런 것 같다. 남이 볼 때, 밖에서 볼 때, 서로 놀라기도 하고 대단하다 감탄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고.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나한테는 그랬다. 물론 재미있게 보았다.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술적 삶은 지속가능한지 생각해 보았다.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찬사는 나한테는 '서울사람들이 먹고 감탄한 강원도 산나물' 같았다.

맛있고 좋고 귀하고. 알지만 지속가능할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 어쩌다 한 번.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일생에 한 번 잊을 수 없는. 그러나 날마다 먹을 수는 없는, 또 먹지도 않을. 그런 맛. 한 번의 예술체험.

도시 생활의 피곤을 풀러 가는 별장 같달까.

그러니까 내가 볼 때 <퍼펙트 데이즈>는 '나물을 먹고 놀라워하는 서울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아 저렇게 살다니.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지. 하지만 내 삶은 아닌. 싫은 건 아니지만 저런 삶도 있구나.

삶의 한 방식.


예술이 그렇다. 예술적일수록 그렇다. 예술이 곧 구원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달과 6펜스>의 화가가 될 수 도 없다. <필경사 바틀비>가 될 수 도 없다. 돌풍이 등을 떠밀듯 스피노자 책을 읽고 예수처럼 된 <수선공>이 될 수도 없다. 왜냐, 예술은 낭만이 아니니까.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다. 그럼에도 비껴갈 수 있지만 빗겨 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삶. 그것이 운명이라고 한다. 그때, 우리는 숭고하다든지 경이롭다든지 언표불가능하다든지 여러 말을 붙인다.


<퍼펙트 데이즈>에 나온 청소부도 과거 있는 남자 같아 보인다. 옛날에 금송아지 없었던 사람 어디 있으랴.

올해의 영화라는 둥 찬사를 보낸 그 영화가 나한테는 우리가 늘 일상으로 먹고 있던 산나물 같았다.

아 이런 거에 사람들은 놀라는구나 싶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우리 할아버지는 도시로 나왔음에도 과수원을 사서 정착했다. 어릴 때 내 눈에 할아버지는 멋있었다. 지금도 가장 멋진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다. 성실히 노동했다. 날씨가 좋으면 '아 날쎄 잘한다' 감탄하셨다. 이두매미가 울 때 낮잠을 주무시고. 비가 오면 고전을 소리 내서 읽으셨는데 사극의 한 장면처럼 참 듣기 좋았다. 작은 오빠와 장기도 두고. 나한테는 마술도 보여 주셨다. 어릴 때는 진짜 할아버지 목뒤에 저금통처럼 구멍이 있는 줄 알았다. 거기다 돈을 넣어서 입으로 나오는 줄 알았다.

돌아가실 때는 책상 앞에 앉아 낮잠을 주무시듯 졸다가 장손인 큰오빠 품에 안겨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신선이 되신 것 같다.

<퍼펙트 데이즈>를 보면서 나는 힘든 노동을 평생 묵묵히 해 낸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런데 치매 걸린 내 남편도 그랬다. 할아버지가 내 이상형이어서 그랬는지 남편도 꼭 할아버지 같다.

할머니가 현관에 나서면 할아버지는 얼른 할머니 신발을 앞에 놓아주셨다. 지갑에 할머니 젊었을 때 찍은 흑백사진을 평생 지니고 있었다. 내 남편도 지금까지 그러고 있다. 근면 성실하다. 근면 성실을 야유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한때는 개근상에 시큰둥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뀌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무언가를 지속한다는 것. 그거야 말로 잘 사는 인간의 길이 아닐까 싶다.


남편 치매 얘기에 내 글이 아름답다며 한 편의 시 같다는 사람도 있다. 아름다운 동행이라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는 카페 회원들은 예의 그 서울 사람들 같다. 그들은 모르는 살벌한 풍경이 있다. 나도 몰랐다.

그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줄 알았다. 또 다른 카페 게시글들을 보기 전에는 말이다.

콧줄 뱃줄 욕창 중환자 심지어 죽고 싶다는 영케어러들 앞에 내 사연은 그저 다른 세상 사연이다.

아니면 너도 멀지 않았다. 네 차례도 곧 온다 이던지.

치매 카페 게시판을 처음 봤을 때 아비규환 생지옥 같았다. 게시판의 제목 만으로도 처참했다.

발작. 장애진단. 요양원. 실종. 영정사진...

남편 간병 18년. 죄를 받은 것인지 묻는 중년 여인.


내사연은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가볍고 가벼운 투정에 불과했다.

시인 노천명처럼 "발은 땅을 딛고도 별을 쳐다보며 산다"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뜬구름 잡는 삶을 살았는지 직면했다. 처맞기 전까지 모른다는 권투선수의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가난해도 그리스 귀족처럼 프랑스 중산층처럼 산다며, 인간이 밥만 먹고 어떻게 사냐고. 어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었다. 비디오가게 알바를 하면서 내가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라도 되는 양 떠들 때도 있었다. 예술영화를 찾아보던 때도 있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도 봤고, <토리노의 말>도 봤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예술체험 후 무기징역수들한테 감옥이라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삶이 곧 거대한 감옥인 것이다. <토리노의 말>을 보면서, 신은 어째서 이런 세상을 만들었을까. 이런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 걸까. 감자 두 알을 채 먹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그 황량함에 매료가 됐었다니. 그런데 영화가 아닌 현실 앞에서 나는 철이 없어도 분수도 없이 없었다. 입으로만 예술을 떠들던 가면 쓴 허영덩어리.

나는 루쉰의 '아큐'였다.


치매 카페 게시판, 가족 독박 돌봄으로 지친 사람들한테 예술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게 <퍼펙트 데이즈>는 어떤 의미일까?

이제는 일상을 지속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먹고, 걷고, 말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술이고 구원이다.

그런 <퍼펙트 데이즈>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남편의 일상은 분주하다. 하루를 시간대별로 기록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소설까지 쓴다.

지난 2년 동안 남편은 꾸준히 소설을 썼다. 장편 2편. 단편 15편. 1차는 손으로 쓰고 2차는 워드로 치며 수정한다. 남편의 뒷모습을 보다가 "저렇게 멀쩡한데 뭐가 치매라는 거지?"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치매가 맞다. 원고 정리를 아침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하던데 보니까 3쪽을 못 넘겼다.

일상이 변하긴 했다. 치매 전과 치매 후가 완전히 달라졌다. 퇴행이다.

이행이 아닌 퇴행이 맞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행해야 하는데 능동에서 수동으로 퇴행한 게 맞다.

그럼에도 여전히 움직이고는 있는 것이다. 남편의 글쓰기는 남편을 구원하고 있는 것일까?


예술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현실적으로 '치매'를 고쳐 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예술은 구원이다. 남편의 글쓰기는 구원이 맞다.

남편의 글쓰기는 치매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려는 숭고한 몸부림이다. 강렬한 생의 의지다. 존재론적 위안과 삶의 지속성을 제공해 준다. 삶의 존엄을 지키는 중요한 통로이다. 그러니 남편의 글쓰기는 그만의 '퍼펙트 데이즈'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자 구원이다.

남편한테 예술은 실천이다. 예술적 삶은 지속가능하다.


단, 치매라는 변수 앞에서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치매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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