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하루
오슬로에 도착하고 몇 시간 되지 않았을 때 우리 네 명 모두의 생체시계는 아마 저녁 6-7 정도였지 싶다.
하지만 그 시각 오슬로는 점심 정도인 12시였다. 배도 고팠고 날도 추웠고 우리는 다음 무언가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 밤비행기에서 잤다고 하루를 시차 없이 무사히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지만 둘러볼 것들이 너무 많아 보여 그냥 몸이 움직여졌던 것 같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피곤한 기색 없이 눈만 보면 뒹구는 바람에 숙소 주변을 여유롭게 구경하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다른 북유럽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슬로 사람들에게 겨울 수영과 사우나는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것이 동네를 걸으면서 느껴졌다. 도심의 작은 피요르드 하나하나를 살려 산책할 수 있는 데크를 만들고 테라스가 넓은 집합주택을 지어 놓았으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으로 바로 바다에 뛰어들고 보트를 탈 수 있는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오슬로에서 5일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기에 첫날부터 너무 힘을 빼지 않기 위해 잠시 몸을
녹이기로 했다. 숙소에서 15분 정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네 카페로 들어갔다. 넓은 창을 통해 아이들이 카페 앞에서 눈놀이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곧 점심시간이라 주변 직장인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은 우리나라 카페들이 다들 너무 인테리어나 콘셉트를 잘해 놓아서 크게 놀라움이 있는 공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브런치 카페였다. 분위기와 인테리어는 화이트와 우드톤으로 꾸며진 심플하고 소박한 스타일이었다. 커피와 핫초코가 담겨 나온 도자기 컵과 유리컵도 화려하지 않고 차가운 오슬로의 바람을 머금은 듯 평온해 보였다.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고 우리는 오슬로 시내로 이동했다. 카페에서 조금 걸어 처음으로 트램을 타보았다. 5분정도 걸어 오슬로 센트럴 스테이션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책에서만 보았던 유럽의 트램을 타니 아이들은 너무 좋아했다. 승용차나 버스처럼 멀미도 하지 않고 흔들림도 많지 않아 아이들의 취향에는 안성맞춤이었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노벨평화상 센터가 있는 시내에 도착했다.
우리가 오슬로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이었던 12월 10일에 노벨평화상 수상식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경비가 삼엄한 편이었다. 수상자와 관련 인사들이 묵고 있는 오슬로 센트럴 그랜드 호텔 문앞에는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다. 실제 수상자는 이란의 여성 인권운동가 [나르게스 모하마디] 라는 사람인데 옥중상태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이 대신 수상을 하러 온 듯했다. 아무튼 크리스마스 분위기 가득한 그랜드 호텔 앞은 뭔가 긴장된 분위기가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예상하지 못했던 오슬로 여행의 또 하나의 발견이라고 지금에서야 생각해 본다.
조디댑 주연의 찰리와 초콜릿공장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오슬로 초콜릿 FREIA 샵도 지나쳤다. 초콜릿은 못참는 우리는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초콜릿 공장같은 스케일은 아니였지만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색상에서 이미 달콤함이 느껴졌다. 한 알씩 파는 초콜릿도 몇 알 사서 나누어 먹어보고 기념품으로 벽면에 붙어있는 박스 초콜릿 스몰 사이즈도 몇개 구입했다.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이어졌다. 여행기간을 겨울방학 시작 전으로 정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눈앞에 보였다. 움직이면서 말하는 순록이 입구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목을 끄덕이며 우리를 반겼다. 다양한 크리스마스 전통 먹을거리 상점으로 가득했고 목도리나 장갑 같은 겨울 용품들도 팔았다. 핫쵸코와 뱅쇼도 김을 폴폴 내며 팔리고 있었다. 입맛 돋우는 애플 캔디도 식욕을 자극했다. 현지 오슬로 사람들도 많이 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제대로 느껴졌다. 찬바람과 눈, 그리고 크리스마스 장식,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맛있는 겨울 먹거리들이 한데 모여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오슬로를 진정 느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 바로 옆에는 확 트인 오슬로 전경을 볼 수 있는 관람차가 있었다. 우리는 1인당 3만원 정도되는 비용을 내고 관람차에 탄 것 같다. 오슬로 극립극장과 크리스마스 상점들이 길게 늘어 서 있는 모습, 프레이아 네온사인, 노벨평화상 센터, 오래 된 건물의 호텔까지 볼만 한 풍경이 펼쳐졌다. 도심 구시가지에는 오래된 유럽풍 건물들이 모여있고 멀리 보이는 피요르드 근처에는 새로 지어진 건물들과 한창 공사중인 높은 타워 크레인들도 보였다. 다른 날 조금 어두워지면 불빛이 반짝거릴 때 크리스마스 마켓을 제대로 느끼기로 하고 노르웨이 왕궁으로 발을 옮겼다.
눈 쌓인 노르웨이 왕궁은 겨울왕국 같았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성은 아니였지만 설국과 차분한 노란색의 왕궁이 함께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는 근위병 앞에서 사진도 하나 남기고 넓디 넓은 눈이 쌓인 왕궁 앞 들판에서 마음 껏 구르며 또 오슬로의 겨울을 만끽했다.
흑야시즌이라 3시 정도가 되자 슬슬 어둠이 찾아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왕궁까지 둘러보고 나니 허기와 추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낮(?)에 먹은 핫초코와 커피빨이 다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이쯤 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 오는길 트램을 타기 전에 MENY 마트에 들렀다. 보통 COOP 마트가 많은데 빨간색 로고로 된 MENY 마트가 눈에 띄어 들어가 보았다. 내가 여행에서 제일 좋아하는 그 나라 그 도시 마트가기는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온갖 채소와 과일, 알록달록 포장지를 가진 요거트와 우유, 주스, 치즈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마트 내부에는 델리도 있었는데 배가 너무 고팠는지 사진도 찍지 않고 구운 연어와 립을 사서 급하게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 때문에 한국에서 가져온 햇반과 델리에서 사온 연어를, 그리고 김치 통조림으로 후다닥 저녁을 차렸다. 한국에서도 노르웨이 연어를 먹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더 맛있었다. 아이들도 엄청난 속도로 맛있게 먹어 주었다. 남편과 나는 마트에서 맛나보이는 라거 맥주와 저렴한 와인을 사서 식사와 함께 마셨다. 같이 사온 립도 맛있었다.
처음 오는 오슬로라서 어쩌면 호텔이 더 편하고 안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로 현지인의 숙소를 고른 것은 이런 소소한 재미와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였다. 물론 한국에서 아이들 밥차리는 건 좀 귀찮을 때도 있지만 현지 슈퍼에서 장을 보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사는 집의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식사를 직접 해 먹는다는 것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꽤나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는 것 같다.
덴마크 맥주 투보그는 크리스마스 때 마다 캔디자인이 다른 크리스마스 에디션을 출시 하는데 마트에서 눈에 보이길래 한팩을 바로 샀다. 목넘김과 청량감은 말해 뭐합니까. 눈과 조명을 바라보며 마시는 겨울 투보그는 잊을 수 없는 오슬로의 저녁 중에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