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의 월요일

by 건강한 오후

계산대 앞에서 0.5초간 멈칫한다. 습관적으로 지갑 깊숙한 곳,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법인카드가 있던 자리를 더듬은 탓이다. 그 찰나의 망설임을 가로채며 친구의 카드가 단말기에 닿는다. '삑' 소리와 함께 점심값이 지불된다. 25년 동안 내 몸의 일부였던 '상무'라는 직함은 유효기간이 지난 영수증처럼 힘없이 구겨졌다.


퇴사 후의 월요일은 낯설다. 알람도 울리지 않는다. 휴대폰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아침을 깨우던 메시지와 보고서가 사라진 자리에 느슨한 시간만 고여 있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280번 버스 정류장. 오전 10시 30분.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이어폰을 낀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보따리를 든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 계신다.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는다. 5년 전 같았으면 나는 이 정류장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280번 버스가 모퉁이를 돈다. 버스 기사는 언제나처럼 나를 본다. 이름도 직함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나는 세상과 연결된 한 점으로 돌아온다. 25년 동안 나는 항성이었다. 그러나 이 버스 안에서 나는 차창에 몸을 맡긴 익명의 승객일 뿐이다. 그 끄덕임이 나를 일상의 궤도로 밀어 넣는다. 카드를 댄다. '삑' 소리가 난다. 그 짧은 기계음. 나는 승객이 된다. 창가 좌석에 앉는다. 버스가 출발한다.


재활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던 날들이 떠오른다. 치료사가 말했다. "침대 난간 잡고 일어서 보세요." 팔이 떨렸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허리에서 번개가 쳤다. 주저앉았다. 옆 침대 환자가 눈을 피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날 밤, 나는 병실 천장을 보며 울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렀다. 시내를 지나고 남강을 건넌다. 차창 밖으로 국립경상대학교 칠암캠퍼스의 나무들이 스쳐 간다. 지금은 가을이라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나무들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지만,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길을 간다.


맞은편 좌석에 대학생이 졸고 있다. 이어폰 줄이 턱 밑으로 늘어졌다. 창가에는 할머니가 보따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계신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그러나 같은 버스에 탔다. 같은 길을 간다. 운전석에서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골목들이 이제야 선명하다. 5년 전, 내 차는 이 길을 수없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목적지라는 점만을 쫓느라 길 위의 풍경들을 모두 지우며 달렸다. 상무라는 높은 의자에서 내려와 버스 좌석이라는 평범한 높이에 앉고서야, 나는 비로소 사람들의 표정과 계절의 속살을 읽기 시작했다.


병원. 11시 정각. 간호사의 나직한 목소리, 소독약 냄새, 대기실의 건조한 침묵. 대기실에서 옆자리 노인이 약 봉투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명함을 묻지 않는다.


"제육볶음 어때?" 병원을 나선 친구가 묻는다. 그는 메뉴판을 보지 않는다. 이미 갈비탕을 먹을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짧게 "좋아"라고 내뱉는다. 사실 내 몸이 원한 것은 뚝배기 속에서 펄펄 끓는 갈비탕의 진한 국물이었다. 그 뜨거운 김 사이로 오래전 회식 자리의 고기 냄새와 명함이 오가던 웃음소리가 되살아났으나, 이내 1만 5천 원과 8천 원 사이의 투명한 경계가 나를 현실로 불러 세웠다.


나는 8천 원의 숫자 아래로 몸을 낮춘다. 친구는 갈비탕을 주문하고, 나는 제육볶음을 고른다. 한때 나는 명함이라는 종이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궤도를 벗어난 지금에야 깨닫는다. 스스로 타오르는 대신, 타인이 내어준 온기 곁을 도는 위성의 삶에도 고유한 질서가 있음을 말이다. 그 침묵의 틈새에서 나는 배운다. 호의를 주는 것이 권력이라면, 그 호의를 온전히 받는 것은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염치.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친구가 아무 말 없이 물컵을 밀어준다. 물소리가 허기를 덮는다. 그러나 갈비탕 냄새는 계속 맴돈다. 나는 다음 주에도 제육볶음을 고를 것이다. 언제까지일까.


오후 2시. 다시 280번 버스에 오른다. 오는 길보다 승객이 적다. 빈 좌석들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온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버스의 진동이 몸을 통과한다. 이 떨림이 나를 깨어 있게 한다. 버스가 남강 다리를 건넌다. 강물이 햇빛에 부서진다. 다 탕진하고 나서야 남은 것이 나였다.


집 앞 정류장에 내린다. 버스가 매연 한 줌을 남기고 다시 제 길을 떠난다. 나는 골목으로 접어든다. 200미터 앞 국밥집에서 김 냄새가 흘러나온다. 저녁 무렵이면 친구와 함께 그곳에 앉을 것이다. 뜨거운 국물을 나눠 마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다. 바람이 강둑의 억새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흔들림이 몸에 닿는다. 마당의 감나무에는 주황빛 감들이 중력을 견디며 매달려 있다.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될 수는 없어도, 누군가의 중력권을 지키며 도는 위성의 삶에도 평안은 있다.


대문을 연다. 감나무 아래 떨어진 감 하나가 썩어가고 있다. 발로 밀어낸다. 창문을 연다. 마당의 감나무를 본다. 항성의 빛을 끄고 나니, 비로소 집의 온기가 느껴진다. 280번 버스가 오늘도 나를 실어 날랐다. 내일도 버스는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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