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자리에서 더 멀리 뛰기

by JIPPIL HAN

고3 1월부터 시작한 일본유학시험공부는 11월 시험까지 쉼 없이 계속 됐다.


우리 집의 아침 풍경은 바뀌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본어 단어를 외우고 있는 딸의 소곤소곤하는 목소리가 부엌까지 들려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가방만 내려놓고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주말에도 친구들과의 약속을 거의 잡지 않았고, 여름방학엔 하루 10시간 넘게 독서실과 집을 오갔다.

모든 고3이 그렇듯이 안쓰러웠지만 그 눈빛 속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고 믿음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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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필기.jpg 딸이 공부했던 노트와 단어장들


11월, 드디어 시험 날이 다가왔다.
고사장 앞에서 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냥 아는 것만 잘 풀고 와. 부담 갖지 말고.”

그러나 딸의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바닥에 스며드는 그 냉기가 딸의 긴장감을 그대로 전해 주는 듯했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고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아…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10개월 남짓, 쉼 없이 달려왔지만 완벽한 성적을 담아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시험 성적표는 잔인하게도 크리스마스이브 날, 우편함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봉투를 뜯는 순간, 종이 위에 적힌 싸늘한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보다 저조한 성적.

딸은 잠시 멍하니 종이를 바라보다가 억지로 싱긋 웃어 보였지만 실망감은 감출수 없었다.
공부한 만큼의 보상을 기대했던 마음이 현실의 매서운 칼바람에 무너진 듯했다.

그날 저녁, 식탁 위엔 크리스마스 케이크 대신 평범한 저녁 반찬이 올랐다.
우리 집 거실은 유난히 고요했고 누구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해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소리 없이 지나갔다.


물론 점수에 맞춰 대학을 고르고 원서를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처음부터 한국에서 갈 수 있는 대학보다 한 단계, 아니 두 단계는 더 높은 곳이었다.
일본의 명문대에 가겠다는 꿈 앞에서, 그저 시시한 대학에 지원하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경험 삼아라도 진짜 가고 싶은 곳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결국 규슈대학(국립)과 도시샤대학(사립), 두 곳에 원서를 제출했다.


몇 달 뒤, 결과 발표 날. 모니터를 보던 딸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문 앞에 나는 한동안 서 있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실패의 무게는 본인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후, 딸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엄마, 앞으로 6개월만 더 해볼게.”

다음 해 6월에 치를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말이었다.
그 짧은 문장 속에서, 나는 단단히 굳어진 의지를 느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실패는 딸을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단단하게 세워주는 과정이라는 것을.
한 번 넘어졌지만, 그 쓰라림이 더 멀리 뛰기 위한 단단한 발판이 될 거라는 것을.



- 다음 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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