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알로고스_투어
(경주 첨성대)

with 칼 세이건 Carl Sagan

by 리얼흐름

겨울 초입, KTX가 경주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진우는 가방을 메고 내려, 역사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창문 너머로 스치는 논과 고분의 둥근 곡선, 그리고 마른 갈대밭이 번갈아 나타났다.

버스는 천천히 시내를 빠져나와, 첨성대 근처의 버스정류장에 멈췄다.

차가운 바람이 불자 목도리 틈으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황남빵과 대추차 냄새가 진우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종이봉투 속에서 갓 구운 황남빵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팥소가 입안 가득 퍼졌다.

첨성대 잔디밭 앞, 회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빛, 어딘가 먼 시간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 칼 세이건이었다.


진우: “경주에 오신 건 처음인가요?”
세이건: “네. 그런데 이 돌탑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진우: “별을 보던 곳이죠.”
세이건: “그렇죠. 하지만 별을 본다는 건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기억을 남기는 행위죠.”


두 사람은 잔디 위를 천천히 걸었다.

진우: “여기서 본 별과, 지금 우리가 보는 별은 같은 걸까요?”
세이건: “빛은 오래 걸립니다. 어쩌면 지금 보는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죠.”
진우: “그 말은 우리가 과거를 보고 있다는 건가요?”
세이건: “네. 과거의 빛이 현재를 비추고 있는 셈입니다.”


진우는 봉투에서 황남빵을 하나 더 꺼내 건넸다.

세이건: “이건 무슨 빵이죠?”
진우: “경주에서 유명한 황남빵이에요. 팥이 꽉 차 있죠.”
세이건: “달콤하군요. 우주에도 이런 달콤함이 있을까요?”
진우: “별빛은 달콤하진 않지만, 보는 사람 마음은 달콤해질 수 있죠.”


잔디밭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두 사람은 첨성대를 바라볼 수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진우: “이 돌은 천 년 넘게 여기에 서 있었어요.”
세이건: “천 년… 인간에겐 긴 시간이지만, 우주에겐 짧은 순간이죠.”
진우: “그럼 우리의 삶은… 더 짧은 순간이겠네요.”
세이건: “그렇기에 더 빛나야 합니다.”
진우: “어떻게요?”
세이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래 남는 방식으로요.”


진우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사 온 종이컵 대추차를 건넸다.

세이건: “따뜻하군요. 이 맛은…”
진우: “한국에서 겨울에 자주 마시는 차예요. 대추로 끓이죠.”
세이건: “별 관측 중에도 이런 걸 마셨을까요?”
진우: “아마도 그 시절엔 술이나 차였겠죠. 별을 오래 보면 몸이 식으니까요.”


멀리서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달려와 첨성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세이건: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도, 이 돌은 여기에 있을까요?”
진우: “그럴 겁니다. 다만 하늘은 조금 다를 수도 있죠.”
세이건: “하늘이 바뀌어도 별은 있습니다. 단지 보이는 위치가 달라질 뿐.”
진우: “우리 삶도 그런 걸까요? 내용은 같고, 자리만 달라지는?”
세이건: “아니요. 삶은 별보다 빠르게 소멸합니다. 그래서 더 귀하죠.”


두 사람은 잔디밭 끝까지 걸었다. 첨성대 뒤편으로는 고분들이 이어졌고, 그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진우: “여기서 별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요?”
세이건: “아마 고향을 보는 기분일 겁니다.”
진우: “별이 우리의 고향이라고요?”
세이건: “네. 우린 별의 먼지로 만들어졌으니까요.”
진우: “그러면 죽은 뒤에 우리는 다시 별로 돌아가는 건가요?”
세이건: “그렇죠. 원소로 흩어져서, 다시 어딘가의 생명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경주첨성대(칼세이건)본문.png


바람이 세게 불자, 종이컵이 굴러가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진우: “첨성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별을 덜 보았을까요?”
세이건: “아마도. 관측 도구는 사람의 눈을 하늘로 올려놓으니까요.”
진우: “지금은 스마트폰으로도 하늘을 볼 수 있죠.”
세이건: “하지만 보는 것과 느끼는 건 다릅니다.”
진우: “느끼는 건… 어떻게 배울 수 있죠?”
세이건: “배우는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노을이 첨성대 위를 붉게 물들였다.

진우: “이 노을도 언젠가 사라질 빛이겠죠?”
세이건: “네. 하지만 사라진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면, 그것이 의미입니다.”
진우: “기억은 기록과 어떻게 다른가요?”
세이건: “기록은 남기기 위한 것이고, 기억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진우: “그럼 첨성대는 기록인가요, 기억인가요?”
세이건: “둘 다입니다. 기록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기억으로 남았죠.”


바람이 잦아들자, 하늘에 첫 별이 나타났다.

진우: “저건 무슨 별일까요?”
세이건: “아마 금성일 겁니다.”
진우: “천 년 전에도 저 자리에 있었을까요?”
세이건: “아니요. 천 년 전엔 조금 다른 자리에 있었겠죠. 하지만 그 빛은 여전히 같은 별에서 왔습니다.”
진우: “별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의 시선은 변하네요.”
세이건: “그게 진화입니다. 시선의 진화.”


세이건과 헤어진 후 진우는 생각했다.

'첨성대는 별을 보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칼 세이건은 내게 말했다.
별을 보는 것은 미래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우린 그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돌을 쌓고, 이야기를 전한다.
별과 돌 사이에서, 인간은 비로소 시간을 갖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