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알로고스_투어
(낙산공원)

with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by 리얼흐름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려, 좁은 골목을 지나 낙산공원으로 향했다.
바람이 매섭게 불었지만, 공기는 유리처럼 맑았다.
성곽길 위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고, 성벽 틈새로 서울의 지붕들이 바둑판처럼 깔려 있었다.
진우는 붕어빵 한 봉지와 따뜻한 두유를 들고, 전망대 벤치로 향했다.
거기서 가방 속 노트를 꺼내려는 순간, 옆자리에 회색 코트를 입고 베레모를 쓴 여인이 조용히 앉았다.
그녀는 바람을 막으려 목도리를 고쳐 매며 말했다.


보우아르: “모성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합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분명해서, 진우는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진우: “… 시몬 드 보부아르?”
그녀는 눈가에 짧게 미소를 띠었다.

진우: “방금 그 말, ‘모성은 선택이어야 한다’… 당신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보부아르: “'제2의 성', 아마 그 부분일 겁니다. 여성은 태어나서 여성이 되는 게 아니죠.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진우: “하지만 생명을 지키는 건 중요한 가치 아닐까요?”
보부아르: “그렇습니다. 다만 그 생명이 여성의 몸 안에 있을 때, 그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더 중요하죠.”


진우와 보부아르는 약속이나 한 듯 일어나 붕어빵 봉지를 들고 성곽을 따라 걸었다.

노을빛이 성벽의 거친 돌 위에서 잔잔히 번졌다.
보부아르: “당신은 낙태를 생명의 침해로 보나요, 아니면 권리의 행사로 보나요?”
진우: “솔직히 말하면… 예전엔 생명을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보부아르: “대부분 그렇죠. 하지만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습니다.”

진우: “그렇다면, 선택의 자유가 무제한으로 주어져야 하나요?”

보부아르: “아니요. 선택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 책임은 당사자가 지는 것이지, 사회가 대신 짊어질 수는 없습니다.”
진우: “그럼 법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보부아르: “법은 최소한의 울타리여야 합니다. 여성의 경험과 몸에 대해서는 법이 겸손해야 하죠.”


낙산공원(시몬드보부아르).png


전망대에 도착하니 바람이 얼굴을 파고들었다.

둘은 이번에도 약속이나 한 듯 앉기에 가장 적당한 벤치에 앉았다.

멀리 남산타워와 한강이 흐릿하게 보였다.
보부아르: “당신은 여성의 권리가 남성의 권리와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진우: “다르다기보다…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보부아르: “맞아요. 여성의 권리는 결핍이 아니라 박탈의 역사입니다.”


둘의 입에서는 어두워져 가는 시간에 맞추어 옅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 입김은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 아련하게 그들 주변에 머물렀다.

진우: “'제2의 성'을 쓸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보부아르: “모든 여성이 같은 억압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걸 설명하는 일이었죠. 계급, 교육, 문화… 그것들이 여성의 삶을 너무 다르게 만듭니다.”
진우: “그러면 낙태 문제도 한 가지 입장으로 정리할 수 없겠네요.”
보부아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보다 ‘경험’을 더 신뢰합니다.”


진우는 남산타워를 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보고 이야기하는 보부아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진우: “당신의 사상은 실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죠?”

보부아르: “네. 사르트르와의 대화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실존주의는 ‘자유’와 ‘책임’을 떼어놓지 않아요.
낙태도 마찬가지죠. 선택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책임입니다.”
진우: “그 책임을 누가 지는지가 핵심이군요.”
보부아르: “맞습니다.”


둘은 생각보다 거센 바람을 피하려 성곽 아래로 내려와 작은 휴게소에 들렀다. 붕어빵을 하나 건네자 그녀가 말했다.

“이런 간식은 프랑스엔 없죠. 하지만 추운 날 손을 덥히는 방식은 비슷합니다.”
진우: “어떤가요?”
보부아르: “뜨겁지만 금방 사라지는 온기… 마치 자유 같습니다. 지키려면 계속 손에 쥐고 있어야 하죠.”

진우: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죠.”

보부아르: “네, 특히 종교계에서. 그들은 생명을 신의 영역으로 보았고, 여성의 선택을 불경으로 여겼습니다.”
진우: “그럼에도 당신은 계속 말했네요.”
보부아르: “침묵은 동의와 같으니까요.”

진우: “결국 생명과 권리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건가요?”

보부아르: “양보할 수 없기에,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진우: “오늘 당신 이야기를 들으니, 제 입장도 흔들리네요.”
보부아르: “흔들림이 바로 생각의 시작입니다.”


보부아르는 짧은 인사를 한 후 어두워져 가는 낙산공원의 성곽을 다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실존주의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진우는 배낭에서 노트를 꺼내 시인지 에세인지 모를 글을 하나 쓰기 시작했다.

'노을 진 성곽길에서 만난 한 여인은 붕어빵의 김처럼 짧고 뜨겁게 말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모성을 의무가 아닌 선택이라 했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했다.
낙태라는 주제는 단순한 찬반이 아니라, 생명과 자유, 법과 경험, 신념과 사랑이 뒤엉킨 길이었다.
내가 믿던 확실함은 오늘, 바람 속에서 조금 부서졌다.
아마 그것이 내가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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