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알로고스_투어
(부안 내소사)

with 나가르주나 Nagarjuna

by 리얼흐름

군내버스는 부안읍에서 내소사로 가는 좁은 시골길을 천천히 달렸다.

차창 밖으로 갈색 논과 감잎이 떨어진 마을길이 스쳐 지나간다.

종점에서 내린 진우는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느티나무와 단풍나무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마른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놓인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앉아 배낭을 풀었다.

모과차에서 은은한 향이 올라오고, 인절미와 밤떡을 한쪽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때였다. 그의 시야 한쪽에 붉은 깃발 같은 옷자락이 스치더니, 고요하게 다가온 노승이 입을 열었다.


나가르주나: “고통을 없애려 하지 말고, 고통을 보는 방식을 바꿔야 하네.”
진우: “혹시… 누구?”
나가르주나: “혹자는 용수보살로 부르지만 그대들의 언어로 나가르주나라고 하네...”


진우는 나가르주나가 현재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의 사상은 알지만 그를 전설 속의 인물로만 생각했다.

진우: “저는 왜 비슷한 고통을 계속 겪는 걸까요?”

나가르주나: “그건 고통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 자네 마음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일세.”
진우: “그러면 고통이란 실체가 없는 건가요?”
나가르주나: “고통은 경험으로서 실재하지만, 그 본질은 ‘공(空)’이네.”
진우: “공… 없다는 뜻 아닌가요?”
나가르주나: “많은 이가 그렇게 오해하지. 하지만 ‘공’이란 ‘없음’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존재함’을 말하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해 일어나고, 홀로 존재하지 않네.”
진우: “그럼 고통도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군요.”
나가르주나: “맞네. 원인과 조건이 모이면 나타나고, 흩어지면 사라지네.”



바람이 불어 단풍잎이 몇 장 벤치 위로 흩날렸다.
진우: “그럼 ‘중론’에서 말하는 ‘팔 불(八不)’이랑도 관련이 있나요?”
나가르주나: “그렇지. 불생불멸, 불상불이, 불거불래… 모든 존재는 절대적인 시작도 끝도 없고, 서로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네. 고통도 마찬가지일세.”
진우: “그 말은, 고통에 절대적인 ‘처음’이나 ‘끝’이 없다는 건가요?”
나가르주나: “그렇네. 단지 조건이 바뀌면 고통의 모양도 바뀌지.”


부안내소사(나가르주나)본문.png


진우: “그럼 어떻게 살아야 덜 괴로울까요?”

나가르주나: “고통을 없애려 애쓰지 말고, 그걸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게. 나와 타자, 현재와 과거, 감정과 감각 사이의 경계를 흐리면 고통은 그 틀 속에서 희미해진다네.”
진우: “집착을 버리라는 말인가요?”
나가르주나: “집착조차 집착하지 말게. 집착을 버리겠다는 생각도 또 하나의 집착이 될 수 있네.”
진우: “... 그건 꽤 난이도 높은 말씀이네요.”
나가르주나: “그래서 수행이라 하지 않나.”


내소사의 단풍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멀리에서 단체로 몰려오고 있었다.

나가르주나: “그대는 왜 이 절에 왔는가?”

진우: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조용히 생각하고 싶어서요.”
나가르주나: “도시는 어떤 곳인가?”
진우: “편리하지만, 사람 마음이 늘 바쁘고 비교하게 만들죠.”
나가르주나: “그렇다면 도시는 ‘집착의 장터’이겠군.”
진우: “정확한 표현이네요.”
나가르주나: “그대 시대에는 고통을 피하려고 어떤 수단을 쓰는가?”
진우: “스마트폰, 인터넷, 게임, 여행… 하지만 돌아오면 고통이 여전히 있어요.”
나가르주나: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한 관계성일세. 피하려 해도, 조건이 그대로면 다시 나타나지.”


둘은 한참을 떨어지는 단풍을 관찰했다.

진우: “그러면 고통을 관찰하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나가르주나: “먼저 숨을 관찰하네. 숨은 붙잡을 수 없고, 밀어낼 수도 없네. 고통도 그렇지.”
진우: “그건 명상과 비슷하네요.”
나가르주나: “명상은 도구일 뿐, 목적이 아니네. 깨달음은 ‘관계의 이해’에서 오네.”
진우: “관계의 이해…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나가르주나: “고통이 일어날 때, 무엇이 그 고통을 가능하게 했는지 원인을 찾게. 그 원인이 변하면, 고통의 모양도 변한다네.”


진우는 밤떡을 꺼내 나가르주나에게 권했다.

나가르주나: “달고 부드럽군. 이 맛도 조건이 모여 나타난 것이지. 땅, 비, 햇빛, 사람의 손길… 모두 관계 속에서 존재하네.”
진우: “그러니까, 이 맛도 ‘공’이군요.”
나가르주나: “옳네. 고통도, 기쁨도, 모두 그렇게 존재하네.”


늦가을 햇살이 단풍잎 사이로 기울며 대웅보전 처마 끝에 부딪힌다.

이윽고 조용한 산사를 뒤덮는 관광객들이 그들 주변을 에워쌌다.

진우: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조용함을 찾으러 왔다가 어수선함에 둘러 쌓였네요...”
나가르주나: “혼란한 가운데의 수행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지. 그게 바로 마음의 무게를 바꾸는 수행일세.”
진우: “오늘 만남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가르주나: “잊음과 기억조차 공이네. 하지만 지금 그대의 마음에 남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네.”


시끄러워진 내소사를 보고 합장을 한 후 내려가는 진우에게 더 이상 관광객들의 소음은 혼란이 아니었다.

수행을 돕는 삶의 소리이며 그것 또한 자연의 소리였다.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앞, 붉은 단풍 아래에서 나가르주나와 마주했다.
고통은 실재하지만, 그 본질은 관계 속에 있었다.
조건이 바뀌면, 고통도 변한다.
모든 것이 흘러가듯, 고통마저도 머물다 가는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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