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알로고스_투어
(순천 낙안읍성)

with 정약용

by 리얼흐름

순천의 로컬버스는 창문 틈새로 바람과 먼지를 함께 실어 날랐다.

진우는 낡은 버스 좌석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초가지붕을 번갈아 보았다.
버스가 읍성 앞 정류장에 멈추자, 내린 순간부터 공기는 습하고 부드러운 흙냄새로 가득했다.

마을은 진흙담이 이어지고, 지붕 위 짚은 빗방울이 스미기 전의 건조한 냄새를 풍겼다.
관광객은 거의 없었고, 멀리서 닭 우는 소리만이 고요를 깼다.

진우는 좁은 흙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한 남자가 무릎을 굽히고 흙담 모퉁이에서 무언가를 연필로 적고 있었다.
짧은 갓, 회색 도포, 손에는 간이 목측기.

진우: “혹시… 정약용 선생님?”
정약용: “아, 마침 짚으로 얹은 지붕의 경사각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진우: “지붕 각도를요?”
정약용: “비가 고이지 않고 흘러내리게 하려면 적정 각도가 필요하오. 이것이 바로 생활 속 학문이오.”


두 사람은 우물가 앞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주민이 내온 약초차에서 솔잎 향과 쌉싸래한 기운이 퍼졌다.
찰보리떡은 손바닥만 했고, 유과는 바람처럼 가벼웠다.

정약용: “철학은 먼 하늘이 아니라, 발밑에 있소. 마을 하나를 바르게 운영하는 것이 곧 철학이오.”
진우: “철학자라면 더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약용: “보편성은 생활 안에 숨어 있소.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진리요.”
진우: “그럼 실용적인 지식이 철학이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정약용: “그렇소. 내가 쓴 책들 대부분이 바로 그 믿음 위에 있소. 농사, 수리, 형법… 전부 사람을 살게 하는 법이지.”
진우: “목민심서 같은 책이요?”
정약용: “맞소. 목민이란 곧 ‘백성을 살리는 일’이오.”


약초차를 한 모금 깊게 마신 정약용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진우를 보며,

정약용: “자네 시대에도 아니 현대 시대에도 백성을 살리는 학문이 있나?”

진우: “네, 사회복지나 도시계획 같은 것들이 있죠.”
정약용: “그것들이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나?”
진우: “변화는 있지만, 여전히 형식적일 때가 많아요.”
정약용: “그럼 그것은 반쪽 학문이오. 책 속에서만 있는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네.”
진우: “선생님 시대에도 그런 경우가 많았나요?”
정약용: “많았지. 그래서 나는 실제로 써먹는 법을 기록하려 애썼소. 한 바퀴 돌고 오세...”

순천낙안읍성(정약용)본문.png


정약용은 낙안읍성 안쪽으로 진우와 걸어 들어갔다.

어느 구역의 흙담이 무너져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새 흙을 발라 쌓고 있었다.

정약용: “사람도 마을도 무너지기 마련이오. 중요한 건 무너지지 않는 게 아니라, 다시 쌓는 법을 아는 것이오.”
진우: “그게 실학이군요. 삶에 닿은 철학.”
정약용: “실학은 쓰기 위한 학문이오. 쌓아 올리는 손길 속에 진리가 있소.”
진우: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손보다 기계에 의존하죠.”
정약용: “기계도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니, 그 원리를 아는 게 중요하오.”


평상으로 돌아와 빗방울을 피해 옷깃을 여몄다. 약초차에서 올라오는 김이 코끝을 간질였다.

진우: “철학을 책이 아니라 생활에서 찾는다면, 공부하는 방식도 달라져야겠네요.”
정약용: “맞소. 현장을 보고,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과정이 곧 공부요.”
진우: “그럼 이 마을의 문제는 뭘까요?”
정약용: “지금 돌아보니 젊은 사람이 적다는 것. 일손이 줄면 담도, 길도, 마음도 무너지지. 또한 이곳은 관광지일 뿐이지 지금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며 사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진우: “그건 현대 농촌의 문제와 같네요.”
정약용: “그러니 예전 철학이 오늘에도 쓰이는 것이오.”


갓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진우를 보며 물었다.

정약용: “자네는 어떤 공부를 하나?”

진우: “철학을 좋아하지만, 실무적인 일과는 멀리 있죠.”
정약용: “그렇다면 내가 묻겠소. 철학이 밥을 먹여줄 수 있다고 보나?”
진우: “직접은 아니지만, 생각의 방향을 정해주죠.”
정약용: “그 방향이 결국 밥을 만드는 데 쓰이면, 철학도 밥을 먹여주는 셈이오.”


정약용은 노트에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빗물받이의 각도와 물 흐름의 선이었다.

정약용: “이 계산은 큰 학문이 아니오. 하지만 이걸 모르면 지붕은 새고, 곡식은 젖지.”
진우: “작은 계산이 많은 것을 지키는군요.”
정약용: “그렇소. 작은 실용이 모이면 철학이 되지.”
진우: “그럼 철학의 크기는 측정할 수 없겠네요.”
정약용: “마음과 삶에 닿는 만큼이 크기요.”


빗줄기가 조금 굵어졌다.

담 모퉁이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진우의 신발에 튀었다.

정약용: “자네는 비를 피하려 하지 않는구려.”

진우: “여행 중엔 이런 날씨도 기억이 됩니다.”
정약용: “좋소. 철학도 그렇소. 불편함 속에 배움이 있지.”
진우: “비를 맞는 게 공부라면, 오늘은 많이 배운 셈이네요.”
정약용: “그렇다면 이 빗방울도 실용이오. 다음 담을 더 단단히 쌓게 만들 테니.”


마을 어귀까지 걸어온 두 사람은 우산 대신 소매로 빗방울을 닦았다.

정약용: “자네는 오늘 무엇을 얻었나?”
진우: “작은 실용이 모이면 큰 철학이 된다는 것.”
정약용: “좋소. 그걸 잊지 말게. 철학은 생활을 떠나면 숨을 못 쉰다네.”


빗줄기는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사라지는 정약용을 보며 진우는 생각했다.

오늘 나는 정약용 선생과 마을을 걸었다.

철학은 담벼락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쌓는 사람들의 손안에 있었다.
스마트폰과 네트워크 속에 사는 나에게도, 결국 필요한 건 무너진 걸 다시 세우는 힘이었다.
실용이 철학이 될 수 있다는 것, 오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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